AI는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학습하고 추론해야 하며, 이를 위해 대규모 연산을 초고속 및 저전력으로 처리하는 반도체를 요구한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AI와 고성능 컴퓨팅(High Performance Computing, HPC)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반도체 삼국지'의 주인공인 TSMC,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각기 다른 전략과 혁신으로 새로운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 세 기업의 성장 과정과 차별화 전략, 그리고 최근 동향과 미래 전망을 짚어본다.
TSMC는 1987년 대만 정부의 전략적 지원과 창업자 모리스 창의 결단으로 탄생했다. 당시로선 혁신적이었던 '순수 파운드리' 모델, 즉 반도체 설계는 고객사가 하고 TSMC는 생산만 맡는 구조를 도입했다. 이 전략은 설계 기업(팹리스)들은 막대한 설비 투자 없이 칩 설계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TSMC는 애플, 엔비디아, AMD, 퀄컴 등 글로벌 IT 기업의 생산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TSMC는 첨단 미세공정(3나노, 2나노 등)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며, 고품질과 고수율(양품 비율) 생산능력으로 고객 신뢰를 쌓았다. 2010년대 후반, 10나노 이하 미세공정에서 경쟁사를 앞서며 애플의 A시리즈 칩 전량을 수주한 것이 결정적 성장 계기가 됐다. 2025년 1분기 기준,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67.6%로, 2위 삼성전자(7.7%)와 압도적 격차를 보이고 있다.
최근 AI와 HPC 수요가 폭증하면서 3나노 칩은 전체 매출의 22%를 차지하며, AI 인프라 투자 확대와 맞물려 성장세가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 일본, 유럽 등 글로벌 생산기지 확장으로 지정학적 리스크에도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다만 미중 무역 갈등과 같은 국제 정세가 잠재적 변수로 남아 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산업 진출은 1974년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의 미래 가치를 내다보고 부실기업 '코리아세미콘덕터'에 과감히 투자하면서 시작됐다.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전원을 끄면 데이터가 사라지는 휘발성 메모리)을 개발하며 일본을 추월,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강자로 부상했다. 현재 삼성전자는 메모리(정보를 저장하는 반도체), 파운드리, 시스템 반도체(정보를 처리하는 반도체) 등 반도체 밸류체인 전 영역을 아우르는 종합 반도체 기업(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IDM)이다. 메모리 부문에서는 세계 1위를 지키고 있지만, 파운드리 부문에서는 TSMC와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생산뿐 아니라 설계도 병행하는 IDM 구조라 팹리스 고객사와 잠재적 경쟁 관계에 놓일 수 있다. 또한 첨단 공정(3나노, 2나노)에서 수율이 TSMC에 비해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첨단 공정의 수율 개선 및 대형 고객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여러 기기와 서비스를 하나로 연결하는 '통합 AI 솔루션' 등 차별화 전략으로 반전을 꾀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1983년 설립이후 1985년 64K D램 양산에 성공하며 반도체 제조사의 길을 걸어왔다. SK하이닉스는 파운드리보다는 메모리 반도체, 특히 D램과 전력 소모가 적고 동시에 고속으로 데이터 이동이 가능한 HBM(고대역폭 메모리, D램을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린 3D 구조의 차세대 휘발성 메모리) 분야에 집중해 왔다.
2009년부터 HBM 개발에 착수해 2013년 1세대 제품을 내놨으며, 2세대 HBM2 및 3세대 HBM3 제품을 엔비디아 등에 공급하며 AI 시대의 핵심 부품 공급사로 부상했다. 2025년 1분기 기준, SK하이닉스는 D램 시장에서 36%의 점유율로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으며, HBM부문에서 70% 이상의 점유율로 압도적 1위를 기록했다. HBM3 시장에서는 90%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6세대 HBM4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강점은 AI 시대에 필수적인 HBM 메모리에서의 기술 우위와 생산 안정성이다. 엔비디아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AI 반도체에 HBM을 적극 채택하면서, SK하이닉스의 성장세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AI 및 고성능 컴퓨팅의 폭발적 성장, 그리고 곧 도래할 양자컴퓨팅 시대는 반도체 산업의 지형을 다시 한 번 뒤흔들고 있다.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 초미세공정, 첨단 패키징, 글로벌 생산망 확장에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며, AI 반도체 시장의 제왕 자리를 굳히고 있다. 삼성전자는 2나노 이하 공정, 차세대 메모리, 시스템 반도체와 패키징의 융합 등에서 반전을 노리고 있다. SK하이닉스는 HBM4 및 HBM5 등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와 AI 서버 시장에서의 압도적 우위로 새로운 성장 신화를 써내려 가고 있다. TSMC는 파운드리의 황제로, 삼성전자는 종합 반도체 강자로, SK하이닉스는 AI 메모리 혁신의 선두주자로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 기업의 경쟁과 미래를 향한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앞으로 반도체 시장은 단순한 미세공정 경쟁을 넘어, AI, 양자컴퓨팅, 첨단 패키징, 공급망 안정성 등 복합적인 혁신이 승부를 가를 것이다. 누가 더 빠르게 변화에 적응하고, 글로벌 고객의 신뢰와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는가에 따라 반도체 패권의 주인공이 결정될 것이다. AI 혁명과 함께 펼쳐질 '반도체 삼국지'의 다음 장, 그 승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약력>
최형일 숭실대학교 명예교수
(전) 숭실대 IT대학 학장
(전) 숭실대 정보과학 대학원 원장
(전)컴퓨터사용자협회 고문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