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운수 나쁜 날이 있다. 타인에 시달리고 책임감에 억눌려 몸과 마음이 축축 처지는 날. 그럴때면 사소한 마찰에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나도 모르게 가시 돋친 말들이 튀어나온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 벌컥 화를 낸 대상이 살인마라니.
21일 개봉한 영화 '주차금지'(감독 손현우)는 주차로 시작된 사소한 시비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생활 밀착형 스릴러 극이다. 이혼 후 한국으로 돌아온 오연희(류현경 분)는 김해철 부장(김장원 분)의 도움으로 계약직 과장으로 일을 다시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김 부장의 의도적인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고, 주차선을 지키지 않는 이웃 이호준(김뢰하 분)과도 갈등이 생긴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상황이다. 사람은 많고, 공간은 한정적이다. 나 하나 챙기기도 벅찬데, 이웃들은 퍼스널 스페이스를 계속해서 침범한다. 참다 참다 한 마디 했더니, 적반하장의 반응이 돌아온다. 지침의 연속이다.
다수의 여성 직장인이 겪어봄직한 상황도 세심하게 풀어냈다. 상사의 호의에 감사한 마음을 가졌을 뿐인데 "같은 마음 아니였냐"는 오해를 받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직장에서도 자신을 둘러싼 추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여러차례 해명도 해보지만 정작 당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없다. 마음대로 사생활을 떠벌릴 뿐이다.
류현경은 좌절스러운 상황 속에서 점점 지쳐가는 오연희를 능숙한 연기력으로 그려낸다. 김장원 역시 마찬가지다. 김해철이 가진 뒤틀린 욕망을 광기 어린 모습으로 표현하며 극의 몰입감을 높였다. 그런가하면 극 중반부부터는 김뢰하의 연기 차력쇼가 이어진다. 살기 어린 눈빛을 할 때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다. 캐릭터의 설득력 없는 행동과 과도한 웃음 포인트가 흐름을 끊는다. 연희와 호준의 갈등이 육탄전으로 치달은 후에는 전개가 늘어지며 긴장감을 흐트러뜨린다.
그렇지만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영화관을 나가며 '나는 이번주 타인에게 얼마나 친절했나' 되돌아보게 된다. 주차선, 집, 화장실 등 '퍼스널 스페이스'를 활용한 공포 또한 흥미롭다. 섬뜩하고도 현실적이다. 91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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