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는 삼국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군사 요충지로서 주목받았다. 섬 전체가 하나의 요새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왼쪽 강화역사관과 맞붙은 갑곶진에서 용진진을 지나 오두돈대·강화외성 등 100km 해안선을 따라 구축된 5개의 진과 7개의 보, 그리고 53개의 돈대, 12곳의 성곽 등 관광유적이 널려있다.
그 중심에 강화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산성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가 서울을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1232년 6월)하면서 축성한 내성·중성·외성 중 내성에 해당된다.
초기 내성은 1.2km의 토석잡축성으로 쌓았다. 내성 안에는 궁궐과 관청을 건립하고 그 규모나 배치도 개경을 옮긴 듯 했다. 즉 강화 북산을 개성의 송악으로 바꾸고 신궁을 지어 ‘연경궁’으로 불렀다.
내성을 지키기 위해 옥림리 성문고개에서 연화동 남산을 돌아 창성까지 9km 중성을 축성하고 선인문, 태안문 등 8개의 성문을 내고 이름도 개경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성문은 지금 모두 멸실됐다. 현재 중성의 위치는 선원면 토성터로 추정하고 있다.
보수한 서문 첨화루
서문 홍예문과 천장 석호 그림
외성은 중성을 수비할 목적으로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대규모로 쌓았다. 총 길이가 1만 1232m였다. 중성과 외성은 모두 토성으로 쌓았다.
하지만 강화산성(내성 중성 외성)은 고종 46년(1259) 몽고가 고려와 화친의 조건으로 모두 헐어야 된다는 단서를 내걸었다.
몽고의 독촉으로 성곽을 허물던 병사들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울며 말하기를 “이럴 줄 알았으면 당초에 성을 쌓지 않았던 것만 못하리라” 했다.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큰 우레 같아서 아이들과 여자들 모두 슬피 울었다. “몽고군은 모든 성을 무너뜨리고 난후 곡식과 민가를 불태워 그 흔적이 성안에 헤아릴 수 없었다”고 고려사는 적고 있다.
그 후 부서지고 무너진 강화산성의 내성은 조선시대 숙종 3년(1677) 현재의 강화읍 소재지를 감싸며 남산정상을 휘감아 북산 산등성이를 타고 넘는 높이 3~5m의 총길이 7.2km를 이었다. 동서남북에 4대문과 4개소의 암문 및 남장대와 북장대, 서장대를 세우고 2개소의 수문도 설치했다.
세월이 흘러 성벽위의 여장(총을 쏠 수 있는 시설물)과 4대문의 문루. 성벽들이 멸실됐다.
폭우로 무너진 남문(안파루)은 1974년에 복원하고 강화남문 편액은 김종필 씨가 썼다.
서문은 1977년 다시 보수하였으며 첨화루 현판은 당시 그대로다. 북문은 원래 홍예석축만 있었으나 정조 7년(1783) 진송루라는 문루를 세웠다. 그 문루도 멸실된 것을 1977년 복원했다. 동문(망한루)는 2004년 복원했다.
오두돈대 전경
서문위에 있는 암문
강화산성 북산 성벽
강화산성 옛 정취는 서문과 남문사이의 작은 암문과 첨화루라는 서문, 그리고 성벽은 남산과 북산에 드문드문 허물어졌지만 원형으로 남아있다. 나머지 성벽은 도시개발로 무도 멸실됐고 남문 인근에만 복원돼 있다.
남산정상에 있는 남장대는 건물기단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북산 정상에 있는 북장대는 조망권이 압도적이다. 서장대는 서문 안쪽에 터만 남았다. 그 아래 비문인 연무당은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부산과 인천. 원산까지 개항을 하게 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근세에 강화산성은 많은 건물들이 소실됐다. 1866년 10월 16일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성곽과 행궁 등 성안의 건물들이 파괴되고 불탔다. 이때 규장외각에 소장됐던 고문서와 전적이 약탈당했다.
복원한 강화외성 전돌 성벽
복원한 강화산성 석수문
고려 무신정권을 탄생시킨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뒤 강화도에 유배됐던 비운의 왕 ‘희종’의 석릉. 고려 후기 강종의 부인이었던 원덕태후 유 씨의 무덤인 곤릉 등 고려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국내 유일의 강화군은 고려문화유산을 보존하기위해 2012년까지 8백억 원의 예산을 들여 강화산성을 우선적으로 복원하기로 했다.
지난 7월에는 강화군 선원면 창리와 신정리 구간의 도로 확장 공사를 하던 중 고려시대 중성의 성터 흔적이 발견되자, 강화군은 중성 발굴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또한 내성과 외성에 대한 복원사업도 대대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강화부도 그림
안덕수 강화군수는 “국내에서 유일한 고려성곽을 복원해 세계적인 관광자원으로 가꿔야 한다”고 말했다.
삼국시대의 쟁탈전, 고려왕조가 몽고에 밀려 39년간 피신했던 곳. 조선인조 때의 정묘호란, 개화기에는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가 넘나들며 위협했고, 현재까지도 수도방위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격변기 때마다 강화도는 나라를 수호했던 투쟁의 역사가 배어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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