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아이들도 당색으로 모이는 나라? [기자수첩-정치]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입력 2023.09.18 07:00  수정 2023.09.22 18:13

조선 때 바라만 봐도 붕당 알 수 있었듯

사먹는 라면·혐오 연예인까지 달라져

'한 나라 두 국민'에 어디로도 못 날아가

정의·공정·상식 중 '상식의 회복' 절실

조선시대 과거 재현행사(사진은 본문의 내용과 관련 없음) ⓒ뉴시스

출입처 경내에 어린이집이 3개 있다. 사무처의 직원들과 의원회관에서 일하는 의원실 보좌진 자녀들을 위한 직장어린이집이다.


최근 의원회관에서 놀랄만한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어린이집의 아이들이 같은 당색(黨色)끼리 저절로 모이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삼삼오오 '절친 그룹'이 형성되기 마련인데, 그 부모를 알고보니 우연찮게도 같은 당 소속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사례일 뿐이고 성급히 일반화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얘기를 들으며 문득 우리 사회의 '한 나라 두 국민' 현상의 일면을 엿본다.


우리나라에서 서로 정치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리며 정치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상대 진영을 향한 증오에 찬 격정토로를 하는 일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온라인 상에서는 "○○○을 도대체 누가 지지하는 거냐.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라는 형태로 표현되곤 한다.


조선 중후기 붕당 정치가 한창일 때에는 서로 말을 붙여 묻고 답하지 않아도, 심지어 통성명을 하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당색을 알 수 있었다. 모자부터 저고리의 깃머리, 옷깃을 여미는 방법까지 모든 게 당색에 따라 상이했기 때문이다.


벼슬하지 않고 있는 선비가 쓰던 복건(幅巾)은 노론은 홑베로 만든 단건(單巾), 소론은 베를 겹으로 써서 겹건(袷巾)을 썼다. 조선시대 때의 초상화에 나온 인물이 복건을 착용하고 있다면 그 복건만 봐도 당색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노론은 저고리 깃머리를 둥글게 말았으나, 소론은 저고리 깃머리를 모나게 세웠다. 모난 저고리 깃머리를 이른바 '당코'라 해서 그 자체가 소론을 가리키는 별칭이 되기도 했다. 또 서인과 남인은 옷깃을 여미는 방향이 달라 서인은 왼쪽을 위로, 남인은 오른쪽을 위로 해서 옷깃을 여며 입었다.


심지어 부녀자의 쪽진머리를 올리는 방법과 치마의 주름까지도 달라, 부녀자가 속한 가문의 당색까지도 알 수 있었다.


쪽진머리를 할 때 노론은 뒷머리를 느슨하게 내려 쪽을 진 반면 소론은 뒷머리를 바짝 당겨 야무지게 말아올려 쪽을 지었다고 하며, 노론은 치마에 굵게 주름을 접되 주름의 숫자는 적었으며 소론은 치마에 잔주름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선비와 부녀자가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아도 한눈에 서로의 당색을 알 수 있었다. 서로 통혼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며, 환국정치로 당쟁의 화가 극심할 때에는 길거리에 멀리서 다른 당색의 사람이 보이기만 해도 마주치지 않게 돌아갔다고 하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시대 때처럼 서로 모자와 옷차림, 헤어스타일이 달라 당색이 한눈에 보이는 수준까지는 다행히 아직 나아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정치 성향이 다른 집안끼리 통혼을 꺼리는 현상은 이미 목격되고 있다.


조선일보가 케이스탯리서치에 의뢰해 올해초 신년 기획 여론조사를 돌려본 결과, 우리 국민 40.7%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 식사나 술자리를 같이 하는 게 불편하다"고 답했다.


본인 또는 자녀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는 43.6%가 "불편하다"고 응답했다. 특히 결혼적령기인 20대 이하 남녀에서는 이 비율이 과반에 육박하는 49.4%까지 올라갔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이처럼 마치 조선시대 사색당쟁 때처럼 돌아가는 모습이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촛불집회로 집권한 문재인 정권이 "나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는 취임사를 헌신짝 내팽개치듯 저버리고 상대편을 궤멸시키겠다는 각오로 적폐청산의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당쟁의 원한이 골수에 맺히게 됐다.


이전까지의 정권교체가 아랫목 내주고 웃목 가서 춥게 사는 정도라면, 문 정권의 적폐청산을 계기로 정권을 내주고 야당으로 굴러떨어진다는 것은 방에서 쫓겨나 한겨울에 밖으로 내몰리는 격이 됐다.


그러니 죽고 사는 문제가 된 당쟁이 격해지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국민들도 각자 지지 진영에 따라 홍해 갈라지듯 두 쪽으로 갈라졌으니 문 정권이 남긴 최악의 유산인 '갈라치기 정치'의 폐해다.


국민들이 서로를 "1찍"과 "2찍"이라 멸칭으로 부르며, 사먹는 라면이 다르고 혐오하는 연예인까지 달라질 지경이 됐다. 부관참시를 하던 시대마냥 한쪽이 나라 지키고 돌아가 국립묘지에 묻힌 분의 안장 기록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붉은 페인트칠을 하자, 세상이 바뀐 뒤 다른쪽은 육사에 배향됐던 분을 소련공산당원이었다며 출향하는 모습으로 맞받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죽창가'를 대신해 '정의와 공정·상식'이 새로운 시대의 캐치프레이즈로 등장하면서 뭔가 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집권 1년 반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새가 하늘을 날려면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가 다 필요하다지만, 날아가는 방향이 같아야 그 방향으로 날 수 있는 것"이라며 "오른쪽 날개는 앞으로, 왼쪽 날개는 뒤로 가려고 하면 그 새는 떨어지게 돼있다"고 말했다.


말인즉슨 옳은 말이다. 문제는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한 나라 두 국민' 상황이 너무나 심해져, 이제는 어느 방향이 우리가 날아가야할 방향인지조차 서로 인식이 달라졌다는 점에 있다. 어느 날개가 가는 방향이 앞이며 뒤인지조차 '공통의 인식'이 없으니, 부질없는 양 진영의 '힘겨루기' 속에서 온 나라가 어느 쪽으로도 날아가지 못하고 멈춰있는 형국이다.


해법은 초심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윤 대통령이 들고나섰던 '정의와 공정·상식' 중에서도 '상식'의 회복이 절실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한 나라 두 국민'이 돼서 점차 사안에 대한 공통된 인식인 '상식' 자체가 없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윤 대통령이 다시 '상식'을 언급하는 횟수가 많아지기를, 그리고 '상식'을 바탕으로 국민을 부단히 설득하고 통합해가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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