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마틸다' 샤프롱 5인의 하루
아역 배우 동선, 그림자처럼 함께
무대 준비부터 연습 파트너까지 다양한 역할 수행
"아역 출연 작품, 샤프롱 도입 법적 근거 마련돼야"
아동문학가 로알드 달(Roald Dahl)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 ‘마틸다’는 똑똑하고 책 읽기 좋아하는 어린 소녀가 부모와 학교 교장의 부당함에 당당히 맞서, 자신의 힘으로 진정한 자아와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유쾌하고 따듯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어린 소녀를 중심으로 극이 펼쳐지는 만큼, 마틸다 역의 임하윤(9)·진연우(11)·최은영(10)·하신비(9)를 포함해 작품에 참여하는 아역 배우만 20명에 달한다.
지난 6월 아역 배우들의 연습으로 시작된 이 작품은 지난달 5일부터 서울 구로구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되고 있다. 연습부터 무대까지 아역 배우들이 겪는 여정, 성장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돕는 건 샤프롱(chaperon)이다. 그래서인지 아역들은 이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른다.
영국에서는 샤프롱 채용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고, 자격을 얻어도 3년마다 지역 행정 당국의 인증을 새롭게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샤프롱의 자격 조건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진 않기 때문에 주로 무대에 대한 이해력이 있는지, 아이들을 좋아하는지 여부가 중요한 채용 기준이 된다.
“연기 전공을 하다 보니 공연계에서 일을 너무 하고 싶었던 차에 전공 교수님께서 샤프롱을 추천 해주셨고, 망설이지 않고 지원을 하게 되었다”(손나경·23) “뮤지컬을 좋아해서 관련된 직업을 찾아보던 중 샤프롱 채용 공고를 봤다. 4남매 중 첫째라 동생들을 챙기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어 샤프롱과 잘 맞을 것 같았다”(서예은·28)는 이들을 비롯해 ‘마틸다’와 함께 하고 있는 5명의 샤프롱 스태프들은 대부분 연기 전공자이거나, 공연 관련 직종을 꿈꾸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3일 오후 2시, 공연에 앞서 디큐브아트센터에서 만난 샤프롱 양소원(27)씨는 대기실 입구에서 아역 배우 임하윤·진연우 양을 마중했다. 그는 함께 도착한 엄마에게 아이들이 먹을 저녁 도시락도 넘겨받았다. 임하윤 양은 “선생님은 내 편이다. 든든하다”면서 화장실을 갈 때도, 물을 마시러 갈 때도 양씨의 손을 꼭 잡고 이동했다. “아이를 절대 혼자 두지 않는다”는 제작사의 설명처럼 양씨를 비롯한 5명의 샤프롱은 각자가 맡은 아이들의 동선을 그림자처럼 함께 했다.
부모가 연습실이나 분장실, 백스테이지 등에 출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샤프롱이 대신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뿐만 아니라 샤프롱은 밥 먹는 시간 외엔 앉아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업무를 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에서 네 명의 마틸다를 담당하고 있는 양씨는 마틸다의 개인 연습 시간, 연출가의 지시 없이도 소품을 척척 옮기고 적절한 타이밍에 효과음을 재생하기도 했다. 마틸다의 상대 역할의 대사를 대신 읊으며 연습을 돕는 것도 양씨의 일이다.
덕분에 무대 실수로 이어질 뻔한 상황을 모면하는 일도 있었다. 임하윤 양의 어머니는 “본 공연 시작 전, 총 연습 당시 퀵체인지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하윤이가 상황을 잘 인지하지 못했는지 당황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샤프롱 선생님께서 빠르게 도와주셔서 연습이 잘 마무리 됐고 하윤이도 매우 고마워했다”고 전했다.
또 “아이의 모든 스케줄은 물론 컨디션이나 건강상태 등 온갖 사소한 것들을 모두 샤프롱 선생님을 통해 전달하고, 전달 받고 있다”면서 “아이만 연습하는 곳에 보내 놓게 되면 부모는 한없이 불안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들을 케어해주시는 샤프롱 시스템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뢰가 생긴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아이들의 유치를 직접 빼주는 일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진연우 양의 어머니는 “연우가 공연 직전, 스탠바이하던 날까지 두 번이나 공연장에서 이가 빠졌다”면서 “샤프롱 선생님이 이를 빼주셨고 퇴근길에 전달해주셨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공연이 진행되는 중에도 샤프롱은 무대 뒤, 대기실 두 그룹으로 나눠져 아이들을 케어한다. 무대 뒤에선 공연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의상을 갈아입히거나 동선을 체크해주는 등의 일을 하고, 대기실에선 스탠바이를 하는 아역들과 함께 돗자리에 삼삼오오 모여서 시간을 보낸다. 이날도 대기실에선 아역 배우들과 샤프롱의 치열한(?) 공기놀이, ‘팝잇’대결 등이 펼쳐지고 있었다.
“샤프롱은 아역 배우에게 있어서 극장의 부모와 같아요. 출근하면서부터 아역 배우의 컨디션 체크, 연습과 공연 일정에 따라 모든 곳을 함께 이동하죠. 그날의 일정에 따라 언제 간식과 식사를 챙기고 공연을 준비하면 좋을지 생각하며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으라고 엄마처럼 잔소리도 하고요. 무대 뒤에서는 항상 무대 위에 있는 아역들을 지켜보고 있고, 상·하수 등장 동선에 따른 이동도 샤프롱과 함께합니다. 대기 중에는 아역들과 공기놀이를 하곤 하는데 오랜만에 하니까 저도 재미있더라고요. 아이들이 잘해서 여러 번 진 적도 있습니다(웃음).” (김슬기)
“컨디션 체크, 공연 준비 등의 업무 외에도 아이들이 대기할 때 함께 놀아주거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저희의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끼리는 극장 엄마, 아빠라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공연이 시작하면 아이들을 케어 하는 일 외에도 아역 배우들이 등장하는 각 장면에 맞춰 필요한 소품을 챙겨주거나, 의상 체인지, 등·퇴장 동선 및 타이밍 체크 등의 일도 하고 있습니다.” (서예은)
아이들을 대하는 만큼, 섬세한 접근도 필요하다. 양씨는 “아이들의 성향을 빨리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마다 반응이 느리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며 각자 어떠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반응하는 예민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를 빠르게 파악해야 아이들의 성향에 맞는 케어를 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제작사 신시컴퍼니 관계자는 “샤프롱을 제도는 한번 이용하기 시작하면, 그 장점들로 인해 지속적인 예산편성을 위해 노력할 분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아역들과 함께 하는 샤프롱들은 자신들의 포지션에 대한 중요성을 더 실감하고 있었다.
“저는 스탠바이하는 아역들을 관리하기 때문에 대기실에서 다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끔 항상 신경을 쓰고 있어요. 아이들이 가끔씩 말을 안 하고 혼자서 참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아이들을 유심히 살피면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죠. 샤프롱이라는 업종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아역들이 나오는 작품엔 꼭 샤프롱을 두도록 하는 법적 근거가 만들어져서 아이들이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마련되길 바랍니다.”(손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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