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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결정적 장면㊵] ‘오마주’, 말할 수 없는 비밀


입력 2022.08.07 11:38 수정 2022.08.07 11:39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영화 '오마주'의 결정적 장면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오마주'의 결정적 장면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허리춤에 차는 전대에는 보통 돈이 들어있다. 애써 벌었기에 허투루 쓸 수 없고 남에게 뺏길 수는 더더욱 없는 소중한 돈. 오래도록, 배우 이정은의 전대에는 수첩이 들어있었단다. 자신을 믿고 빌려준 이들에게 갚아야 할 돈들이 적혀 있는 수첩. 혹시 자신이 잘못되더라도 남은 가족에게 그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의 결과다.


사람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특별한 재주를 지닌 숱한 배우들의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응원하지만 보기 드물게 묵직한 힘, 독특한 음높이와 말꼬리를 지닌 배우 이정은의 승승장구에는 박수가 절로 인다. 그런 이정은이 연기 생활 31년을 지나 첫 주연을 맡았다. 영화 ‘오마주’(감독 신수원, 제작 준필름, 배급 트윈플러스파트너스㈜)이다.


영화 '여판사' 포스터 ⓒ출처=네이버 블로그 toosj895 영화 '여판사' 포스터 ⓒ출처=네이버 블로그 toosj895

영화에는 한국 여성 최초의 감독 박남옥이 언급되고, 두 번째 여성 감독 홍재원의 데뷔작 ‘여판사’가 이야기 중심에 놓여 있다. 1955년 영화 ‘미망인’ 단 한 편의 연출작을 남긴 박남옥 감독, 두 편의 각본을 쓰고 세 편을 감독한 뒤에는 다시 각본가로서 세 편의 영화를 낸 홍은원 감독, 실존 인물을 오늘로 불러낸다.


‘오마주’를 연출한 신수원 감독은 홍은원 감독의 이름을 홍재원으로 바꾸고, 영화사의 기본은 살리되 창작과 상상을 더해 이야기 수레를 굴린다. 많은 부분의 소리를 잃어 마치 무성영화처럼 돼 버린 1962년 작 ‘여판사’ 필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들과 이에 얽힌 사람들의 일상에 흡사 관찰 예능 같은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영화 ‘여판사’는 의사 남편의 시기심에 독살된 여자 판사의 실화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영화는 판타지라, 영화 속 여자 판사는 아내 노릇도 며느리 역할도 잘해 독살되지 않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최초의 여성 영화편집인 이옥희 역의 배우 이주실(왼쪽). 김지완 감독을 연기한 배우 이정은의 모습이 영화를 연출한 신수원 감독과 흡사하다. ⓒ이하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최초의 여성 영화편집인 이옥희 역의 배우 이주실(왼쪽). 김지완 감독을 연기한 배우 이정은의 모습이 영화를 연출한 신수원 감독과 흡사하다. ⓒ이하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배우 이정은이 맡은 역할은 ‘여판사’의 복원을 맡은 감독 김지완이다. 극 중 홍재원 감독처럼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흥행과 거리가 멀어 감독 일을 작파할 기로에 선 인물이다. 생활비를 벌어보겠다고, 쉽사리 투자가 허락되지 않는 네 번째 영화를 아니 감독이라는 직업을 버릴까 말까 갈등을 뒤로 하고 맡게 된 복원 작업. 늘 그래왔듯 성실과 열심 속에 성우의 더빙으로 영화에 말소리를 입히려 하지만 대본이 없다. 입도 읽어 보고 맥락도 맞춰 보며 새로 시나리오를 쓰듯 어렵사리 말을 만들어가는데, 다행히도 우여곡절 끝에 대본 원고를 찾게 된다.


산 넘으니 산이라고, 대본에 견주어 보니 지완의 손에 맡겨진 현존 ‘여판사’ 필름에는 없는 장면들이 있다. 촬영하지 않은 것인지 어떤 연유로 잘려 나간 것인지, 스토리에 시간과 맥락의 비약이 거듭된다. 잘려 나간 부분들, 아니 잘리기 전의 원본 필름을 찾으려는 감독 김지완의 노력은 정성스럽고 집요하고 눈물겹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의 일부를 찾는 장면은 신선하고, 필름 조각을 이어붙여 영사기로 복원해 내는 장면은 압권이고, 잘려 나간 이유는 격세지감 속에 우리 사회 여성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투영하는데 새로 볼 이들의 감동 보존 차원에서 언급할 수 없다. 결정적 장면을 소개하는 기사에 결정적으로 결정적 장면이 없는, ‘소 없는 만두’ 기사를 쓰게 된 변명이다.


아들 상우 역으로 출연한 배우 탕준상의 통통 튀는 에너지가 영화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 아들 상우 역으로 출연한 배우 탕준상의 통통 튀는 에너지가 영화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

영화는 감독 김지완의 고군분투와 동시에 엄마이자 아내이자 며느리 김지완의 일상을 보여 준다. 김지완은 맡은 바 일을 열심히 또 제대로 할수록 엄마와 아내와 며느리로서는 비판과 비난을 산다.


군대보다 못하게 밥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엄마, 영화 하지 마”라고 말하는 자식, ‘꿈꾸는 여자는 남편을 외롭게 하니 결혼을 피하라’고 아들에게 조언한 남편, 냉장고 청소를 문제 삼는 시어머니, 누구도 나빠 보이지 않는다.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말을 할 뿐이다. 2022년 여성 감독 김지완의 삶이 1962년 여성 판사의 그것과 겹쳐 보인다. 21세기 감독 김지완의 사회적 좌표는 20세기 중반 박남옥, 홍은원보다 나은가, 자문해 본다.


20세기 감독 홍재원(오른쪽)과 21세기 감독 김지완의 공존. 홍 감독과 그림자를 연기한 배우 김호정의 목소리가 실존 홍은원 감독의 분위기를 영화 속에 드리운다. 영화 '오마주'는 1세대 여성 감독들에 대한 신수원 감독의 경의, 오마주로 가득하다. ⓒ 20세기 감독 홍재원(오른쪽)과 21세기 감독 김지완의 공존. 홍 감독과 그림자를 연기한 배우 김호정의 목소리가 실존 홍은원 감독의 분위기를 영화 속에 드리운다. 영화 '오마주'는 1세대 여성 감독들에 대한 신수원 감독의 경의, 오마주로 가득하다. ⓒ

젠더 감수성이 중요하고 남성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설득력을 얻은 요즘, 이 영화를 통해 여성의 고충을 읽어달라는 것으로 오해한다면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불편할 수 있다. 아빠들 밥벌이의 엄중함과 고충을, 목숨 걸고 세상과 ‘맞짱 뜨는’ 조폭으로 그려낸 범죄 액션영화 ‘우아한 세계’나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등이 있듯이 여성의 이야기를 그에 맞는 그릇에 담아냈을 뿐이다. 남자가 만든 남자 이야기를 선입견 없이 보듯, 영화 ‘오마주’를 대중 드라마로 보면 코미디도 있고 판타지도 있고 살짝 스릴러도 있다.


영화 ‘오마주’가 지닌 보석 같은 재미들이 ‘여성영화’라는 테두리에 가려지지 않고 보다 많은 오늘의 우리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넷플릭스에도 티빙에도 웨이브에도 있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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