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도입된 외국인 선수제도는 장기적으로 한국농구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힘과 높이를 두루 갖춘 외국인 선수들이 국내에 득세하면서 아마추어 시절까지만 해도 코트를 호령하던 토종선수들은 어느새 외국인들에 밀려 ‘조연’으로 전락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역시 ‘토종빅맨’들이었다. 농구는 ‘높이의 싸움’이다. 프로구단들이 전력강화를 위해 인사이드에 경쟁적으로 우수한 외국인 선수들을 영입, 탄력과 파워에서 밀린 토종빅맨들은 일제히 설 자리를 잃었다.
여기에는 외국인선수 제도 도입 이전까지 소속팀에서 당당한 주전이자 심지어 국가대표로까지 활약했던 선수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서장훈, 김주성 등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하고, 역대 KBL에서 주전으로 뛰었던 토종빅맨은 손에 꼽힐 정도다.
원조 ‘아트 덩커’ 정재근
연세대를 졸업하고 실업팀 SBS와 KCC 등에서 활약했던 정재근은 프로화 이후 쇠락한 토종빅맨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빅맨으로서는 작은 192cm의 신장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운동능력과 정교한 중거리슛을 앞세워 90년대를 대표하는 정통 파워포워드로 군림했던 정재근은 실업 시절까지만 해도 경기당 20-10(득점-리바운드)을 해낼 수 있는 능력에, 실전에서 덩크슛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토종 선수이기도 했다.
93~94 농구대잔치에서 당시 골밑에서 절대무적을 자랑하던 연세대 서장훈을 앞에 두고 통렬한 ‘인 유어 페이스’ 원핸드 덩크슛을 꽃아 넣은 장면, 올스타전 덩크 컨테스트에 출전해 공중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볼을 살짝 빼내어 림에 내리꽂던 슬램덩크 등은 역대 토종 덩크 하이라이트 필름으로 꼽아도 손색 없을만한 명장면이었다.
국가대표로도 맹활약한 정재근은 서장훈과 현주엽의 연이은 부상으로 센터진이 궤멸상태였던 1997년 사우디 ABC대회에서 전희철과 함께 골밑서 분투하며 장신군단을 앞세운 중국과 일본을 연파, 한국에 28년만의 우승을 안기는데 숨은 공신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재근은 프로화 이후 외국인 선수 영향의 직격탄을 맞았다. 힘과 체격에서 월등한 외국인 선수들에게 밀려 자신의 포지션을 내주고 스몰포워드로 전향했고, 공격에서도 3~4옵션으로 밀려났다.
아마추어시절부터 수비가 약했던 정재근은 외국인 선수들을 보조하며 궂은일을 전담해야하는 롤 플레이어의 역할에 적응하지 못하고 프로 2년차부터 사실상 벤치워머로 전락했다.
‘제2의 김유택’ 조동기
90년대를 풍미했던 ‘기아 왕조’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조동기 역시 안타까운 선수 중 한명으로 꼽힌다. 중앙대를 졸업하고 94년 기아에 입단했던 조동기는 당시 노쇠화 기미를 보이던 한기범, 김유택의 뒤를 이어받을만한 차세대 센터로 촉망받던 선수였다.
개그맨 남희석을 연상시키는 친근한 외모와 센터로서는 다소 왜소해 보이는 체격과 달리, 조동기는 긴 팔과 빠른 위치 선정을 이용한 블록슛과 빅맨으로서는 드물게 속공에 참여할 수 있는 민첩한 기동력을 겸비한 정통센터였다.
중앙대와 기아에서 허재, 김영만 등 뛰어난 득점원을 보조하며 수비형 센터라는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정교한 중거리슛 능력도 갖추고 있어 오픈 찬스에서 슈터들의 공격부담을 덜어주는데도 한몫을 했다.
조동기는 95년부터 97년까지 3년간 성인대표팀에도 꾸준히 발탁되며 차세대 센터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했다. 그러나 조동기가 상무 입단 후 프로화가 진행되며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미 그의 자리는 사라진 뒤였다. 여기에 발목부상까지 겹치며 아마추어 시절까지 40분 풀타임을 소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주전 센터는 하루아침에 경기당 5분을 보기도 힘든 벤치워머로 전락했다.
이은호의 잃어버린 시간
‘근육맨’ 이은호는 지난해까지 대구 오리온스에서 활약했다.
외국인 선수 못지않은 당당한 체구와 파워를 앞세워 ‘은호캅’ ‘어깨남‘으로 불린 이은호는 SK빅스(현 전자랜드)에서 뛰던 00~01시즌 평균 11.3점 6.1리바운드로 커리어 최고시즌을 보내며 서장훈과 함께 토종빅맨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팀내에서 정통 빅맨형 외국인 선수 2명을 영입, 이은호의 입지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이때부터 KBL은 장단신으로 분류하던 외국인 선수의 신장제한이 2인 합계 398.78cm로 완화됐고, 각 팀마다 테크니션형 포워드나 가드보다는 골밑강화를 위해 정통 빅맨형 용병 2명을 뽑는 풍토가 정착, 그나마 활약하던 토종빅맨들의 입지가 더욱 줄어들었다.
99년 프로 데뷔이후 매 시즌 향상된 커리어를 보여주며 국가대표팀에서도 꾸준히 선발됐던 이은호는 2002년 이후 순식간에 가비지 타임 멤버로 전락했다. 06~07시즌에는 8경기에서 평균 1.3점. 0.1리바운드. 올시즌에는 15경기에서 3.1점. 1.1리바운드에 그쳤다.
부상이나 컨디션에 이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충분히 뛸 수 있을만한 경쟁력이 있었음에도 감독들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국내 장신선수들이 외국인들의 눈치를 보며 포지션 전향을 고려하고 있던 시기에 당당히 골밑에서 승부하려고 했던 몇 안 되는 선수였기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부익부 빈익빈’ 부채질하는 KBL
이들 외에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라진 아까운 인재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마추어시절까지 장신센터로 주가를 높였던 표필상, 정경호, 정훈종 등은 물론, 결국 포지션을 전향해야했던 전희철, 현주엽, 송영진, 이규섭 등도 넓은 의미에서 외국인 선수제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어차피 철저한 경쟁사회에서 토종선수들이 외국인 선수들에 실력으로 밀린 것을 두고 마냥 시대 탓만 할 것이냐”고 말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외국인 선수제도 자체가 아니라, 당장의 성적에 눈이 멀어 리그 상황에 맞게 제도를 흡수하지 못한 한국농구 자체에 있다.
KBL의 외국인 선수제도는 냉정하게 말해 한국농구의 장기적인 비전보다는 각 구단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즉흥적으로 변모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 초창기부터 섣부른 외국인 선수제도 도입을 놓고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KBL은 구단 전력평준화를 명분으로 팀당 외국인 선수 2인 보유-출전을 강행했고, 이는 국내 선수들의 입지 축소로 이어졌다.
그나마 초창기에는 전희철, 박재헌, 이은호 등 외국인 선수들에 맞서 나름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토종빅맨들이 존재했으나, 또다시 외국인 선수 신장제한의 변화와 자유계약제도의 도입 등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특급 외인 1~2명이 사실상 리그의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국내 선수들은 들러리로 전락했다. 외국인 선수의 몸값을 둘러싼 ‘뒷돈 논쟁’ 등 부작용도 끊이지 않았다.
프로농구는 뒤늦게 외국인 선수 출전제한의 확대와 자유계약제도의 폐지 등으로 개선안을 마련했지만, 지난 10년간 이미 숱한 토종 유망주들이 길을 잃고 고사된 뒤였다.
악순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올해 2008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는 흔히 ‘대(對) 하승진용 드래프트’로 불린다. 신장 221cm의 거인센터 하승진의 등장으로, 10년간 유지되어왔던 외국인선수 신장제한의 틀이 무너지며 이제 210cm 이상의 장신빅맨들이 국내무대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아직 검증도 되지 않은 루키 1명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그나마 국내 선수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였던 ‘신장 쿼터’마저 쉽게 내팽개친 것이다.
물론 신장과 기량을 겸비한 210cm이상의 장신선수를 구하기는 세계적으로도 쉽지 않다. 하지만 높이의 스포츠인 농구에서 프로구단들은 되도록 장신 선수들을 강화하는 선택을 계속할 것이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토종 빅맨들에게 피해로 돌아간다.
외국인 선수들의 수준이 많이 낮아졌다는 올 시즌도 실질적으로 골밑에서 외인들과 경쟁할 수 있는 토종선수는 몇 되지 않았다. 또한, 장신 외국인들의 영입경쟁으로 인한 고공농구의 득세는 한국농구의 강점이던 아기자기한 속공과 다양한 패턴 플레이의 재미마저 빼앗아갈 수 있다.
프로 초창기부터 외국인 선수제도에 관한 숱한 의문과 우려에도 ‘별 문제없다’고 호언장담하다가, 막상 상황이 더욱 나빠지면 ‘아님 말고’식으로 꼬리를 내리던 프로농구계의 행태를 이미 너무 숱하게 보아왔기에 걱정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KBL과 프로구단들의 근시안적인 행정으로 항상 그 후유증을 감당해야하는 것은 바로 한국농구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선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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