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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배우발견㉒] 장태훈, 中인기 잊고 ‘발군의 감초’로 리셋(그대 어이가리)


입력 2022.05.05 09:06 수정 2022.05.05 09:06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배우 장태훈 ⓒ이하 본인 제공 배우 장태훈 ⓒ이하 본인 제공

주연까지 한 배우가, 그것도 중국에 진출해 주연한 배우가 단역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것도 나고 자란 세월 속에 나를 아는 이가 숱한 내 나라에서 말이다. 전단지 돌리듯 프로필을 전하고 포기 없는 오디션 도전을 통해 단역에서 조연까지 성장한 배우가 있다. 장태훈이다.


그를 만난 건 해외 각종 영화제에서 39번 이름이 불린 영화 ‘그대 어이가리’(감독 이창열, 제작 ㈜영화사 순수)가 국내에서 첫선을 보인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였다. 이창열 감독, 주연 배우 선동혁과 정아미에 이어 요양병원 의사 역을 맡은 배우 박정우와 나란히 레드카펫을 밟았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포토월에 나란히 선 배우 박정우와 장태훈(왼쪽부터) ⓒ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포토월에 나란히 선 배우 박정우와 장태훈(왼쪽부터) ⓒ

‘저 배우 누구지?’. 분명 윤동혁(선동혁 분)의 사위 박태훈을 연기한 장태훈 같은데, 영화 속에선 서른여덟 살쯤의 현실 남편이자 의사로 보였는데, 레드카펫 위에선 열 살은 뺄셈한 외모로 혼동을 줄 만큼 말쑥했다.


지난 4월 30일 영화 상영과 GV(관객과의 대화)가 끝난 후, 극장 로비에서 본 장태훈은 흡사 아이돌 같았다. 영화 장면 곳곳에서, 작품의 결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자칫 무거울 수 있는 극의 분위기를 ‘웃음 바람’으로 환기하던 그 배우가 맞나 싶은 청년의 모습이었다. 당시 차담을 나누긴 했지만, 캘수록 새로운 덩굴이 나오는 터라 3일 전화 인터뷰로 이야기를 보충했다.


배우 장태훈은 과천외고를 졸업한 뒤 중국인민대학으로 유학길에 나섰다. 1년 반의 어학연수 뒤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 수학했다. 공부는 중국에서 했어도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었던 그는 지난 2007년 드라마 ‘달려라 고등어’로 배우 인생에 입문했다. 이민호, 문채원, 박보영, 권율 같은 쟁쟁한 신인들이 몰린 드라마였고, 장태훈은 심청아(박보영 분)를 좋아하는 고봉태로 등장했다.


함께 출연한 배우들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장태훈은 답보 상태를 거듭했다. 기회가 생기는 듯하다가도 소속사가 도산하고 연예계 미아가 됐다. 탈출구로 찾은 게 중국이었다. 외고에 진학할 만큼 언어 감각이 좋고 중국에서 대학을 다닌 터라 더빙 없이 중국어 대사를 동시 녹음할 수 있는 한국 배우라는 게 강점으로 작용했다.


중국 드라마 '선풍소녀'에 한국 대표 태권도 선수로 출연한 배우 장태훈 ⓒ 중국 드라마 '선풍소녀'에 한국 대표 태권도 선수로 출연한 배우 장태훈 ⓒ

“2015년 ‘선풍소녀’를 촬영했어요. 보통 중국 드라마는 사전제작제인데 32부작이었던 ‘선풍소녀’는 촬영을 시작하고 2~3개월 후 방영을 시작했고, 시청률을 체감하면서 후반부를 촬영했습니다. 시청률이 4%대였어요, 땅도 넓고 언어도 다른 중국에서는 대단한 수치라고 현지 분들에게 들었습니다.”


“인기 웹소설이 원작이고, 태권도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였어요. 태권도 세계대회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저는 한국 대표로 참여한 민승호를 연기했습니다. 한국 대 중국의 대결 구도 속에서 선수들의 갈등과 우정, 사랑을 다룬 청춘드라마였고 당시 함께 주연한 배우들은 엄청난 스타로 성장했지요. 장안의 화제 속에 시즌2가 제작됐고, 저 또한 (쑥스러워하며) 인기를 얻어 시즌2에 출연했어요.”


시즌2 얘기는 잠시 미루자. 배우 장태훈은 당시 중국어로 연기를 소화했다. 한국인 청소년도 등장하는데 중국인 어린이 배우가 맡았고, 해서 극중 두 한국인은 자연스레 중국어로 배역을 연기했다.


“드라마가 인기 있다 보니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시청자의 문제 제기가 있었어요. ‘왜 한국인끼리 있을 때도 중국어로 해?’. 민승호가 중국인들과 얘기할 때는 중국어로 말한다 해도, 왜 한국인 소년과 말할 때도 중국어로 얘기하냐는 지적이었습니다. 중반 이후부터는 한국어로 바꿔서 촬영했는데, 한국인으로 출연한 중국 청소년들도 한국어로 연기해야 했기에 제가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촬영을 진행해야 했어요. 지금 와 보니 재미있는 에피소드네요.”


드라마 인기 속에 중국에서 차기작 출연도 확정됐지만…, ⓒ 드라마 인기 속에 중국에서 차기작 출연도 확정됐지만…, ⓒ

당시 장태훈의 나이는 서른넷이었는데 20대 초반의 민승호를 연기했다. 타고 난 동안 덕분에 이질감이 없다. 인기에 힘입어 바로 이듬해 시즌2가 제작됐다. ‘1번 주인공’에 한국 배우 지창욱이 영입됐고, 선수들의 이야기에서 코치들의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지창욱은 중국인 코치로, 태권도 고수였는데 대회 도중 사망자가 생기면서 그 트라우마로 은둔해 살다 돌아온 인물을 연기했다. 박태훈은 민승호 이름 그대로 합류, 한국 선수들을 양성하는 코치로 분했다. 태권도 대련은 선수들 선에서 이뤄지고, 코치 대 코치의 신경전과 전략 대결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촬영을 전부 마치고, 방영을 시작해 3회가 전파를 타는 중에 한국과 중국 사이에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문제가 터졌어요. 제 분량이 통째로 편집되고 뒤통수만 나오게 됐어요. 지창욱 배우는 주인공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니까 못 들어내고, 한국 코치 역의 저만 편집됐습니다. 너무 아쉬웠지요. 이미 우리 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중국 리메이크 드라마에 출연 계약도 완료한 상황이었는데, 오창석 배우가 연기한 두 번째 남자주인공 역할에 캐스팅이 됐는데, 다 물 건너갔습니다.”


“2016년, 바로 한국에 돌아왔고 배우로서 암흑기가 시작됐어요. 중국에서 일할 때 ‘선풍소녀’ 입소문에 국내 매니지먼트 세 군데서 연락이 왔었어요. 현지로 컨택트(접촉)도 오고 계약금도 제시받았지만, ‘왔다! 장보리’ 출연도 그렇고 중국 활동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계약하지 않았어요. 중국에서 성공하고 우리나라에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스스로 ⓒ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스스로 ⓒ

급랭한 한국과 중국의 외교 문제 속에 통편집에 촬영 불발을 뒤로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혼자였다. 국내 매니지먼트들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던 자신을 탓하며 그야말로 ‘멘붕’, 판단과 정신의 붕괴를 겪었다. 하지만 장태훈은 남을 탓하며 주저앉는 대신 스스로 일어서는 용기를 냈다.


“외모를 내세울 나이가 아니라는 걸 객관적으로 인정했죠. 연기로 나를 증명해 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프로필을 뽑아서 ‘필름메이커스’ 등(영화인들의 구직 사이트)에 올렸고, 오디션 공고 수집해 이메일로 프로필 넣고 오디션 보고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덕분에 크고 작은 6개 작품을 할 수 있었어요, 상업영화는 단역도 했고요. 어떻게 보면 (단역에서 주연으로 가는 일반적 성장과 반대로 주연에서 단역으로) 거꾸로 간 거죠.”


“서럽기도 하고 눈물도 났지만, 쓸데없는 자존심 부리지 말자! 더 열심히 하고 내가 먼저 다가가서 감독님과 대화하고 연기를 보여 드리자! 다짐했지요. 그런 시간과 선택의 연속선에서 ‘그대 어이가리’를 만나게 됐습니다.”


시간과 장소와 때에 따라 20대에서 40대의 얼굴을 오가는 배우 장태훈 ⓒ 시간과 장소와 때에 따라 20대에서 40대의 얼굴을 오가는 배우 장태훈 ⓒ

‘그대 어이가리’ 역시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된 것인지 궁금했다.


“한국 돌아온 해에 영화 ‘트릭’ 오디션을 봤고, 김태훈(김도준 역) 형의 친동생 영준에 출연하게 됐어요.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무시하고 직진하는 불합리한 관행을 통쾌하게 깨는 영화인데요. 형과 같이 짜고 방송사 속여서 골탕 먹이는 사이다 역할이었습니다. 이창열 감독님 영화였잖아요, 그때 감독님을 처음 뵀네요.”


“감독님께서 그리 잘할 거라 생각하지 않으셨대요, 외모가(웃음). 촬영장에서 열심히 했더니 좋게 봐주셨고 카메라 감독님, 프로듀서님이 제일 의외였던 친구라고 평가하시면서 오히려 더 가까워졌어요. ‘그대 어이가라’ 준비하면서 이 감독님께서 제안을 주셨고, 다시 불러 주신 만큼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진짜 열심히’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는 배우 장태훈의 진심이 수화기를 너머 전해왔다.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대본을 이전보다 10배는 더 봤어요. 전에는 연기할 때 내가 어떻게 하면 주목받을까, 튈까, 강한 임팩트(효과)를 줄까 고민했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하면 튀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평범한 사람으로 보일까를 숙고했습니다. 사람마다 연기 스타일이 다른데 어떤 분들은 대사만 살짝 외워놓고 극 안에서 자유롭게 할 때 자연스러운데, 저는 그렇게 타고 나지 않았어요. 저 같은 경우엔 100번, 200번, 300번 준비하고 연습했을 때 자연스러워져요.”


“촬영장에 1시간 먼저 도착해서 현장 요소를 익히고, 익힌 것을 활용했어요. 이미 준비하고 연습해 왔지만, 현장 상황에 맞게 다시 연습하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서 촬영에 임했어요. 중요한 건 최대한 나를 감추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가 없는 곳’에서도 연기하고 있자! 라는 자세로 연기했어요.”


카메라가 나를 비추지 않는 순간에도 내 역할을 다하는 자세로 계속해서 연기하는 모습에서 배우 유해진이 보였다. 촬영장에 먼저 도착해 현장 요소를 익혀 연기에 반영하는 모습에서는 배우 황정민이 겹쳤다.


영화 '그대 어이가리'의 웃음만발 장면 ⓒ 영화 '그대 어이가리'의 웃음만발 장면 ⓒ

실제로 영화를 보면 장태훈은 치매에 걸린 장모(노연희, 정아미 분)가 목욕탕에서 치는 ‘사고’를 막기 위해 뛰어드는 장면에서 급하게 양말을 벗어 던진다. 처가를 나설 때는 빠짐없이 양말을 챙겨 나간다. 대본에도 없는 실생활 디테일을 챙긴 감각도 좋지만, 그것이 웃음 포인트가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대본과 배역을 이리 보고 저리 뜯은 결과다. 바로 이 순간에도 많은 배우가 그렇게 살고 연기하고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는 틀림없이 미래가 있다.


“저처럼 무명이 긴 사람들은 내가 맞는 길 가고 있나, 내가 추구하고 생각해 온 연기가 맞는 건가, 틀렸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는 건가, 끊임없이 생각하게 돼요.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배우로 살아가고요. 이렇게 묵묵히 해내고 있을 때 누군가 잘하고 있네, 토닥여 주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5년, 10년을 달릴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관객분들이 보내 주시는 관심과 격려가 영화인들에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대본 리딩을 진짜 많이 했어요.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그대 어이가리’의 의상과 상여를 디자인해 주신 이유숙 의상감독님의 공방에서 진행했어요. 그 밖에도 진짜 도움을 많이 주셨는데요. 코로나 시기여서 다 모이긴 힘들고, 주연 네 명이 1주일에 2번씩 만나 연습했어요. 그때 서로 많은 얘기를 나눴고, 연기의 합과 틀도 짜여졌어요. (선)동혁 선배님이 앞장서셔서 장면마다 보여 줘야 할 감정들에 대해 토의했어요. 덕분에 촬영 시작되자 지연됨 없이 따다닥 촬영이 이뤄졌어요. NG 없이 테이크(장면마다의 촬영 횟수) 많이 가지 않으며 촬영했는데, 연극처럼 이미 준비를 많이 했기에 가능했습니다.”


끝이 없는 터널은 결코 없다, 오늘도 걷고 있다면 ⓒ 끝이 없는 터널은 결코 없다, 오늘도 걷고 있다면 ⓒ

코믹연기는 준비만으로 되지 않는다. 정극 연기의 최고봉이 코미디이고, 본인은 진지하게 연기하는데 관객이 웃을 때가 진짜 코미디다. 배우 장태훈은 주연도 아니건만 극의 무게를 덜고, 자칫 끊어질 듯 팽팽히 당겨진 관객의 신경 줄을 이완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사위 박태훈이 등장하면 객석에서는 미리 웃음이 일었다. 빠른 시간 안에 관객 마음에 들어간 배우 장태훈 덕이다.


“시나리오 보면서 이 영화에서 웃길 사람 저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과 대화할 때도, ‘저는 심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쉬어 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고요. 감독님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고요. 어떻게 하면 더 자연스럽게 웃음을 만들 수 있을까가 제일 중요했습니다. 더 표나게 웃길 수 있지만, 일부러 하지는 않으려 노력했어요. 상황이 웃기는구나만 될 수 있게, 재미있게 찍은 게 관객께 그대로 전달돼 재미있게 보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우 장태훈에게 한 명의 관객으로서 답하고 싶다. 억지웃음이 아닌 ‘고소한’ 깨알 웃음을 맛봤다고. 또 말하고 싶다. 본인은 아직 무명의 터널 안으로 걷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터널 밖으로 빛이 뻗어 나오고 있다고. 눈이 좋아서 찾아낸 게 아니라 빛을 따라가니 발견할 수 있었다고. 오늘은 수많은 고민과 연습을 통해 단역에서 ‘발군의 감초’로 부상했지만, 쓴 한약을 목 넘김 좋게 하는 감초 역할을 ‘그대 어이가리’에서 톡톡히 했지만, 곧 많은 이가 알아볼 것이니 부디 조금만 더 힘을 내 걷기를 바란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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