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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th JIFF] 홍경표 감독 "'유랑의 달'은 새 도전, 내면의 쓸쓸함 담으려 노력"


입력 2022.05.04 14:16 수정 2022.05.04 14:16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차기작은 봉준호 감독 애니메이션·우민호 감독 '하얼빈'

데뷔 25년차, "여전히 현장이 좋아"

홍경표 감독의 대표작은 손에 꼽기가 힘들다. 1998년에 데뷔해 '반칙왕'(2000), '시월애'(2000), '킬러들의 수다'(2001), '지구를 지켜라!'(2003), '태극기 휘날리며'(2003), '마더'(2009), '설국열차'(2013), '해무'(2014), '곡성'(2016), '버닝'(2018), '기생충'(2019),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이상일 감독의 '유랑의 달'까지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충무로 대표 촬영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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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표 촬영감독의 렌즈에서 피어난 '유랑의 달'은 기라 유 작가의 동명의 소설이 원작으로, 편견을 초월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홍경표 감독은 '유랑의 달'이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 섹션에 초청돼 이상일 감독과 함께 전주를 찾았다.


전주 영화의 거리 한 카페에서 만난 홍경표 감독은 이상일 감독과의 인연은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밝혔다.


"이상일 감독이 '기생충' 현장에 놀러 온 적이 있었어요. 제가 '분노'를 감명 깊게 봐서 인사를 했고, 이 감독 역시 제 영화를 잘 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촬영이 끝난 후, 봉준호 감독을 통해 같이 작품을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영상 통화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결정했어요. 이상일 감독이 한국말은 서툴지만 다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에는 큰 어려움은 없었죠."


'유랑의 달'은 열한 살의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이모의 집에서 살면서 방황하는 사라사(히로세 스즈)가,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있던 후미(마츠자카 토리)를 따라가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라사는 후미에게서 그리웠던 부모님의 온기와 자신을 아껴준다는 감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후미가 납치범으로 누명을 쓰며, 사라사와 후미의 관계는 끝이 난다. 소아성애자, 스톡홀름증후군 등 이들의 관계를 단정 짓는 건 편견 어린 단어들뿐이다. 외부에서 보는 두 사람의 감정은 금기된 사랑이지만, 사라사와 후미는 결국 다시 한번 자신들의 안락한 세계를 만들어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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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으로 가득한 두 사람의 관계가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일 수 있던 배경에는 이상일 감독의 캐릭터 해석, 홍경표 감독이 만들어낸 미장센, 비주얼들이 큰 역할을 했다. 이상일 감독은 원작에서 9살이었던 사라사의 나이는 11살, 두 사람의 세계가 균열을 일으키는 장소는 동물원에서 호숫가로 변경했다. 이에 홍경표 감독은 공간과 배경들에게서 캐릭터의 결핍과 쓸쓸함을 카메라에 담으려 노력했다.


"소설을 먼저 읽어봤어요. 감정적으로 아련하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었어요. 주인공들의 감성이 굉장히 자세하게 묘사돼 있었고 표현력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하기로 했죠. 복잡한 이야기를 이상일 감독이 두 시간 안에 잘 압축시켰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모든 걸 차치하고 이 소설 작가가 영화를 참 좋아하는구나도 느껴졌어요. 공간이나 배경이 잘 그려졌거든요. 드러나지 않은 사랑 이야기, 혹은 현대인들의 소통에 관한 영화라고도 읽히기도 했어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화면에 잘 표현해야 할까 생각했죠. 이상일 감독의 전작 '악인'이나 '용서받지 못한 자'도 그렇고,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함축돼 있어요. '유랑의 달'도 마찬가지고요."


공간은 정서적으로 외롭고 공허함이 느껴질 수 있는 곳들로 선정했다. 그러나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홍경표 감독이 일본에 입국했을 당시는 델타 바이러스가 빠르게 확산됐을 때였다.


"자가 격리할 때 시간 여유가 없어서 이상일 감독님이 로케이션 사진을 찍어 제게 보내는 방식으로 정했어요. 호숫가, 커피숍, 아파트 등 제가 꼭 봐야 하는 장소들은 격리가 해제되고 돌아봤고요. 일본은 도시가 잘 꾸며져 있더라고요. 공기도 좋고요."


영화 제목이 '유랑의 달'인 만큼 극중 등장하는 달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흐린 구름 사이에 밝게 빛나는 달은 모두 홍경표 감독이 실제로 촬영한 컷 들이었다.


"처음부터 실제로 다 찍으려고 작정을 했어요.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달이 잘 보이더라고요. 달이 보일 때마다 찍어서 그중에 맞는 달을 썼어요.(웃음)"


영화는 구도, 빛, 색보정까지 홍경표 감독이 얼마나 고심해 찍었는지 러닝타임 150분 내내 느낄 수 있다. 한줄기 빛 하나 허투루 쓰지 않았다. 홍 감독은 모두 심혈을 기울여 촬영했지만 영화 초반, 후미와 사라사가 함께 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자연의 도움을 받아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고 전했다.


"영화 초반에 사라사와 후미가 비를 맞으며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있어요. 실제로 바람이 엄청 불어서 나무가 흔들릴 정도였죠. 그 장면을 찍는데 빛이 들어오면서 다리를 훑더라고요. 그 빛이 카메라에 찍혔어요. 마치 두 사람의 운명을 강조하는 것 같았죠. 그때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꼈어요. 자연이 때때로 의도치 않은 느낌을 줄 때 쾌감을 느껴요."


앞서 언급한 장면이 가장 만족스러웠다면, 가장 심혈인 건 마지막 장면이다. 후미가 사라사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장면으로, 후미의 나체가 공개된다. 자칫하면 그동안 쌓아왔던 캐릭터의 정서와 감정이 모두 무너질 수 있었다.


"마지막 후미가 옷을 벗는 장면을 이상일 감독과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도 배우의 연기나 연출이 좋아서 감정들을 해치지 않고 완성할 수 있었어요. 한 테이크 만에 오케이 났어요. 마츠자카 토리가 장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온 것 같았어요. 적정선의 감정을 헤치지 않으면서도 폭발력 있는 연기를 보여줬어요. 그때 배우에게 감탄했죠."


홍 감독에게 이상일 감독은 어떤 사람이냐 물으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으로부터 이상일 감독을 '한국의 나홍진'이라고 전해 들었다며 입을 뗐다.


"집요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찍어나가는 방식을 나홍진 감독에게 비유한 것 같아요. 현장에서 같이 일해보니 섬세하고 디테일하더라고요."


홍경표 감독이 '유랑의 달'에 참여한 이유에는 이상일 감독의 몫이 컸지만 스스로 새로운 환경에서 일해보고 싶은 욕심이 작용했다.


"해외 작품을 하면 배우들도 다르고 환경도 다 다르잖아요. 꾸려가는 방식 자체가 달라서 새롭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기술적으로 새로운 걸 얻겠다 이런 게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서 일하는 것 자체가 도전인 것 같아요. 얻는 게 많거든요."


홍경표 감독은 직접 조명 감독과 팀을 꾸리는 시스템을 고수했지만, '기생충' 촬영 이후 해체 시키고 다시 홀몸으로 현장에 나가고 있다. 이는 해외 작품과의 협업과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됐다. 이번에 '유랑의 달'에 참여한 이유와도 맞닿아있다.


"저도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해외에서 작업하다 보니 다 꾸려 가기도 힘들단 생각을 했습니다. 현지 촬영팀과 작업을 해도 메인 컨트롤은 제가 하니까 문제 될 건 없더라고요. 이번 작품도 이와이 슌지 '4월 이야기'를 작업했던 조명 감독님과 함께 했어요. 저보다 나이도 많은데 감각도 있으시고 이야기도 잘 통하더라고요."


일본의 촬영 현장은 우리나라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다만 차이점을 찾자면 우리나라가 분업이 조금 더 잘 돼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예전 촬영 현장과 비슷해요. 우리가 조금 더 세분화돼 있죠. 일본은 현장 편집이 없어요. '브로커'도 현장 편집이 있지만 안 쓰고 모니터도 잘 안 보시더라고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도 저랑 이야기하면서 장면을 만들어나갔어요."


촬영하면서 또 하나 느낀 점은 일본의 영화인들이 한국의 영화를 좋아하고 현장을 부러워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영화를 많이 보기도 하고 한국의 촬영 현장을 많이 부러워하더라고요. 일본의 현장도 좋았어요. 스태프들이 조용하게 자신의 할 일들을 웃으면서 열심히 하더라고요. 분위기 자체가 그런 것 같아요."


홍 감독의 차기작은 봉준호 감독의 애니메이션과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이다. 봉준호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심해 생물과 인간이 얽힌 드라마로 그는 비주얼 라이팅을 맡았다.


"정말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아요. 버추얼 촬영을 준비하고 있어요. 실제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것처럼 빛의 움직임을 만들려고 해요. 할리우드는 이미 영화 촬영 감독들이 시네마 디렉터 포토 그래퍼로 많이 활약하고 있죠. 많은 말은 못 하지만 엄청난 작품이 될 겁니다."


우민호 감독과 작업하는 '하얼빈'은 다시 한번 극장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각도로 노력 중이다. 당초 러시아 시베리아 로케이션을 할 예정이었으나 전쟁 중으로 이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곳에서 촬영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코로나19로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다시 관객들이 영화관으로 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극장에서만 큰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해요. '하얼빈'을 그렇게 찍고 싶어서 우민호 감독과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있어요. 스펙터클한 영상들로 관객들을 끌어당기고 싶어요. 우리나라에서 본 적 없는 풍경들을 담을 예정입니다."


1998년 영화 '하우등'으로 데뷔해 총 38개의 작품에 임했으며 2021년 제41회 청룡영화상 촬영조명상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020년 제29회 부일영화상 촬영상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019년 제3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촬영상, 2019년 제10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진 홍 감독. 그가 우리나라 최고 촬영 감독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데뷔 25년 차를 맞은 그는 최고의 자리에 있지만, 영광은 잠시 접고 여전히 현장에서 성장할 수 있길 꿈꾼다.


"모든걸 잊어버리고 새롭게 나아가고 싶어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금보다 더 성장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잊는다고 잊히진 않겠지만요. 저는 아직까지 현장에서 촬영하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요. 현장이 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죠. 힘들다가도 좋은 장면이 나와 짜릿할 때 엔돌핀이 막 솟아요. 나만의 스타일을 고수해나가며 한국 영화의 힘을 계속 보여주고 싶어요. 빛을 다루면서 조금 더 거칠게요. 로저 디킨스처럼 짜인 프레임보다는 정교하면서 조금 더 투박함을 보여주고 싶어요."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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