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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결정적 장면⑳] 알 파치노의 눈물, 구찌 가의 몰락(하우스 오브 구찌)


입력 2022.02.07 14:22 수정 2022.02.07 14:22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배우 알 파치노 ⓒ이하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배우 알 파치노 ⓒ이하 유니버셜 픽쳐스 제공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감독 리들리 스콧, 수입·배급 유니버설 픽쳐스)가 극장에서 사라지기 전에 봐야 했다. 점점 상영시간표에서 밀려나고 있으니 말이다.


‘블레이드 러너’ ‘델마와 루이스’ ‘에이리언’ ‘블랙 레인’ ‘글래디에이터’ ‘한니발’ ‘블랙 호크 다운’ ‘어느 멋진 순간’ ‘트리스탄&이졸데’ ‘아메리칸 갱스터’ ‘프로메테우스’ ‘마션’, 인상 깊은 연출작을 열거하는 게 무의미할 만큼 세계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마스터 리들리 스콧이 연출했고. 소위 ‘핫한’ 아담 드라이버와 레이디 가가가 주연하고 명배우 제레미 아이언스와 알 파치노가 힘을 보태고 ‘미스터 노바디’에서 젊은이부터 118세 노인을 연기하며 아홉 가지 인생을 보여준 자레드 레토가 가세했으니 관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스틸컷 ⓒ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스틸컷 ⓒ

158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다소 지루하면 어쩌나 컷을 좀 느슨하게 낭비해서 길어진 건가 생각해 봤던 건 어리석은 추측이었다. 장면 전환이 빨랐고 컷 넘김에 한 치의 낭비가 없었다. 잘못 본 건가 싶어 한 번을 더 봤는데, 두 번째 보니 여든 넘긴 노장의 욕심 없고 미련 없는 깔끔한 편집에 혀를 내둘렀다.


음악은 또 얼마나 기막힌지 OST를 찾아 들어보고 싶은 즐거운 욕망을 가득 안긴다. 배우이자 성우이기도 한 영국의 작곡가 해리 그렉슨-윌리엄스가 맡았는데, 특히 구찌 가의 아들 마르치오(아담 드라이버 분)와 장차 그의 아내가 될 파트리치아(레이디 가가 분)가 트럭운수회사 사무실 책상에서 나누는 사랑에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바이타’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를 얹은 건 천재적이다. 이 과감한 선택을 더욱 멋지게 승화시킨 건 레이디 가가다. 작곡하고 노래하는 음악인답게 아담 드라이버의 팔뚝을 붙들고 리듬과 멜로디에 맞춰 격정을 표현하는데, 가가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명장면을 탄생시킬 수 있을까 싶게 열연했다.


배우 아담 드라이버 ⓒ 배우 아담 드라이버 ⓒ

영화를 볼 때 가장 먼저 마음을 뺏긴 건 아담 드라이버다. 물론 그가 영화의 시작을 열어서기도 하지만, 개인적 선호도 영향이 크다. 서두르지 않고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아 온 지금까지의 행보도 좋았지만 앞으로 큰 역할을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배우인데, 이번에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호연을 조용하게 펼쳤다. 잘생긴 외모로 배우를 하기도 했던 로돌프 구찌(제레미 아이언스 분)의 아들로 마치 명품브랜드 구찌에는 관심 없다는 듯 변호사 공부를 하는 인물인데, 파트리치아를 만나면서 인생에 큰 변화들이 들이닥친다. 그저 아내를 사랑해서 아내 말을 따르는 것인지 걸음걸음 발 딛는 곳마다 아내가 미리 깔아주는 레드카펫이 필요했던 야욕의 인물인지 헷갈릴 만큼 그 경계에서 호연했다.


배우 레이디 가가 ⓒ 배우 레이디 가가 ⓒ

레이디 가가는 ‘하우스 오브 구찌’를 통해 배우 도전해 본 가수가 아니라 배우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앞서 말한 책상 장면뿐 아니라 화상 위험을 염려케 하는 욕조에서의 사랑은 ‘구찌’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파트리치아의 무한 욕망을 명징하게 또 육감적으로 표현했다.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은 ‘구찌’를 갖고 싶어 구찌를 죽이기로 한 그 실행의 순간에 숨을 참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욕조에 잠수하는 장면에서도 서늘하게 드러난다. 아름다워 보이기에 목숨 걸지 않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욕망덩어리를 휘두른 인물을 하나의 기호학처럼 연기했다.


배루 자레드 레토 ⓒ 배루 자레드 레토 ⓒ

주변머리만 있는 가발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차림과 말투와 목소리를 가장해도 예쁜 눈과 또렷한 눈빛은 감출 수 없는 자레드 레토는 한 편의 스릴러 같은 영화에 긴장 이완 역할을 톡톡히 한다. 구찌 브랜드에 파격적 변화를 불러오길 꿈꾸나 재능은 뒷받침되지 않는 ‘보통 사람’ 파올로 구찌 역을 맡은 레토만 등장하면 일단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고, 로돌프가 디자인한 시그니처 스카프를 향해 만행을 저지를 때면 시원한 웃음 줄기가 터진다. 사랑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한 인간의 불안과 우울, 나약함을 실존 인물인 듯 연기했다.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 ⓒ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 ⓒ

나이 들수록 기품이 더해가는 제레미 아이언스는 신경쇠약적이면서도 섬세한 예술 감성을 지닌 로돌프의 애잔한 인생 말년을 입체감 있게 연기했다. 시들어가는 한 그루 나무면서도 파트리치아와의 첫 대면에서는 본능의 날을 세워 내 아들을 망칠 여자인지 진단함과 동시에 왕년 스타로서의 매력을 뽐낸다. 파올로에게 냉정한 평가를 날리는 순간엔 눈아래 깊이 침잠한 병색을 잊게 하는 매서운 독설을 힘있게 내지른다. 명배우는 많은 장면 등장하지 않아도 그 인물의 전사를 상상하고 이해하게 하는 힘이 있음을 확인시킨다.


사실, 그 외 언급하지 않은 배우들을 포함해 적재적소의 캐스팅에 감탄하면서도 알 파치노의 캐스팅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면서도 의문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로돌프의 형이자 파올로의 아버지인 알도 구찌의 마피아 보스 같은 리더십과 인간미, 사업적 탐욕을 충분히 표현해내고 있었지만 어딘가 악랄해 보이기엔 2% 부족했다. 그러나, 결정적 장면에 이르러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깨달았다.


명배우 존재의 이유, 명장면의 탄생 ⓒ 명배우 존재의 이유, 명장면의 탄생 ⓒ

인생 궁지에 몰려 자신이 가진 구찌 지분을 시리아 투자자에게 넘겨야 하는 순간, 그래도 그는 구찌 가의 자존심으로 지분을 지킬지도 모르겠다 싶은 기개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신은 신발 하나에서 이 계약의 장막 뒤에 선 인물을 간파한 그는 눈물을 보인다.


“네가 원한 게 이거냐?”


아이처럼 두 손으로 눈물을 가리지만 멈출 수 없는 눈물을 닦으며 그는 금색 펜을 들어 분노로 배신의 상처를 찢으려는 듯 계약서가 찢길 듯 거세게 사인한 뒤 거칠게 계약서를 넓디넓은 테이블 저편의 외국인 투자가 앞으로 밀어 날린다. 알도가 버린 것은 구찌 브랜드의 지분이었지만 구찌 가의 자존심, 가족에 대한 정은 끝까지 지키려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상대가 내 등을 찌를 때 몸을 돌려 등을 내줬다. 영화 제목 ‘하우스 오브 구찌’의 숨은 뜻일 ‘구찌 가의 몰락’이 알 파치노에 의해 일필휘지로 그려졌다.


길지 않은 이 장면, 명배우 알 파치노는 우리를 숨죽이게 했고 그의 손동작 하나 표정 하나에 집중하게 했고 함께 배신의 쓰린 맛을 곱씹게 했다. 뱃속으로 뜨거운 무엇이 흘렀다. 명배우 존재의 이유, 나이 들어도 명배우의 표현력 그 힘을 잃지 않은 배우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말이 아니라 연기로 입증했다. 우리가 명배우를 해치지 않고, 조금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고이 지켜야 하는 이유를 알게 했다. 그것은 결국 그 명배우를 위한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일이다. 살면서 명장면 하나를 만나고, 그로 인해 우리의 감각세포들이 전율과 함께 깨어나며 시간을 거슬러 회생하는 기회는 쉽지 않다.


영화 포스터 ⓒ 영화 포스터 ⓒ

포털에 공개된 영화에 관한 기본 설명은 ‘처음부터 사랑에 빠졌던 그 이름 구찌 내 것이 될수록 더욱 갖고 싶었던 이름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었던 그 이름 구찌를 갖기 위해 구찌를 죽이기로 했다’이다. 매우 자극적이지만 적절하다. 파트리치아 위주의 설명을 써도 될 만큼 레이디 가가가 열연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명배우들이 못 보고 놓치기엔 아까운 명연을 펼쳤고 몸을 진동시키는 음악들이 딱 떨어지는 순간들에 등장하고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교향곡처럼 연출해 낸 작품이 ‘하우스 오브 구찌’이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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