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 '민중의 적' 키어런 헐리 각색본…11월 14일까지 세종M씨어터
문소리·이봉련 더블 캐스팅, 댓글과 라이브 방송으로 무대 에워싸
헨리크 입센의 ‘민중의 적’(1882)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가장 홀로 선 사람”이라는 토마스 스토크만의 대사로 막을 내린다. 마을 전체를 등지고도 신념을 굽히지 않은 개인에게 바치는 결론이었다. 스코틀랜드 극작가 키어런 헐리가 2021년 이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디 에너미’를 선보였고, 서울시극단이 이 대본을 들여와 무대에 올린 ‘에너미’는 140여 년 전의 그 마지막 문장을 다른 방향으로 고쳐 쓰는 데서 원작과 갈라진다.
뼈대는 원작을 따른다. 온천은 대규모 워터파크 리조트 ‘빅 스플래쉬’로 바뀌었고, 두 형제는 자매 관계로 재배치됐다. 개장을 앞둔 시장 보니는 동생 커스틴의 입을 막고, 특종을 약속했던 기자 베니는 압박 앞에 등을 돌리며, 기댈 곳을 잃은 커스틴이 SNS에 오염 사실을 직접 올리자 게시물은 공유와 댓글을 타고 번져 나간다. 몇 시간 만에 그는 ‘정신병을 앓는 여자’ ‘일자리 천이백 개를 날린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고, 검사 결과의 신뢰성과 박사 학위, 사생활까지 파헤쳐지며, 화살은 딸 페트라에게까지 향한다.
연극 '에너미' 공연 ⓒ세종문화회관
원작이 신문 발행과 시민 집회를 거쳐 몇 날에 걸쳐 진행시킨 추락을, 이 작품은 15개의 장으로 나눠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사건으로 압축하고 그 하루를 다시 105분 안에 밀어 넣었다. 이준우 연출이 “예전에는 신문이 인쇄되고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게시물 하나와 하루면 충분하다”고 말한 그 속도가 공연 시간의 밀도로 그대로 옮겨진 셈이다.
속도를 체감하게 하는 장치는 무대 사방에 걸린 화면이다. 가로세로 50㎝ 패널 162장으로 5개의 화면을 만들어 좌우와 중앙에서 배우를 에워쌌고, 그 위로 유튜버의 라이브 중계와 채팅창, 댓글이 흐른다. 배우가 대사를 하는 동안 화면은 그 대사를 받아 조롱하거나 왜곡하는 문장을 쉼 없이 올려 보내는데, 객석은 이 화면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위치에 있다. 관객은 극을 보는 동안 사실상 앨리 채널의 시청자 자리에 앉아 있는 셈이다.
연극 '에너미' ⓒ세종문화회관
인물 재배치도 갈등의 결을 바꿔 놓는다. 보니는 상수도 교체에 막대한 비용이 들고 ‘독극물 리조트’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지역경제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이유로 동생의 폭로를 막으려 하는데, 황영희가 연기하는 보니는 은폐의 주체이면서 몰락해 가는 소도시를 떠안은 행정가로 서 있어 쉽게 악역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원작의 인쇄업자 아슬락센은 선의와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유튜버 앨리로 바뀌었다. 여론을 만드는 사람이 신문사 사주에서 구독자 수에 기대 사는 개인 방송인으로 옮겨 오면서, 진실 앞에서 흔들리는 이유도 신념의 문제보다 생계와 조회수의 문제에 가까워졌다.
극은 리조트 개장식에서 정점에 이른다. 화려한 조명과 EDM 속에 유튜버가 등장해 쇼를 펼치고, 그 무대에 선 커스틴은 긴 연설을 시작한다. 강훈구 작가가 “이 작품의 백미”로 꼽은 장면으로, 커스틴의 말은 무대 위 군중을 지나 밝혀진 객석으로 향한다. 하루 동안 댓글 창 앞에 앉아 있던 관객이 그대로 피고석에 놓이는 구성이라 불편함은 의도대로 전달된다. 다만 연설의 과녁이 시장과 사업가, 기자를 지나 ‘이익 앞에서 쉽게 돌아서는 다수’ 전체로 넓어질수록, 바로 그 이익을 내밀어 사람들을 움직인 쪽의 책임은 상대적으로 흐릿해진다는 점은 짚어 둘 만하다.
연극 '에너미' ⓒ세종문화회관
입센이 고독한 개인의 강인함에서 결론을 찾았다면 헐리는 다른 곳에 마지막 무게를 둔다. 그는 프로그램북 인터뷰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며 “우리에게는 진실도 필요하지만 함께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진실을 말한 사람이 혼자 남는 것이 당연한 결말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이 작품은 홀로 서는 일의 위엄보다 곁에 남는 사람의 존재를 묻는 쪽을 택했다. 공연은 11월 14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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