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1996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렌트’의 질문은 여전히 낡지 않는다. 1990년대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예술가 공동체가 겪는 빈곤, 질병, 상실, 그리고 사랑은 시대의 옷을 갈아입는 동안 더욱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됐다. 이번 한국 공연은 바로 그 보편성과 현재성을 다시 꺼내어 관객에게 묻는다.
ⓒ신시컴퍼니
올해 10번째 시즌을 맞은 한국 ‘렌트’는 원작의 거친 숨결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의 변화가 만들어낸 감정의 결을 보다 섬세하게 드러낸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답게, 무대 위 인물들은 사랑과 생존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의 리듬은 5인조 라이브 밴드의 연주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박동한다. 록과 알앤비(R&B), 탱고, 발라드까지 장르를 가로지르는 넘버들은 단순히 무드를 전환하는 기능을 넘어서, 인물의 감정과 결정을 밀어붙이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집세도 내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여자친구와 이별까지 맞닥뜨린 다큐멘터리 감독 마크, 에이즈 진단 이후 연인을 잃고 남은 시간을 음악으로 채우려는 로저, 같은 병을 안고도 여전히 사랑을 붙잡고 싶은 미미, 공동체의 중심축이 되는 엔젤까지,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상처와 배경을 품고 무대에 선다.
1막이 이들의 삶과 만남을 차곡차곡 다져간다면, 2막은 그 관계에서 비롯된 충돌과 화해, 그리고 서로를 향해 다시 손을 내미는 순간들로 구성된다. 젊음의 혼란과 자유가 개인의 이야기에서 공동체의 서사로 확장되며, 결국 사랑이 어떻게 상처를 지탱하는지 보여주는 구조가 작품의 울림을 키운다.
이번 시즌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캐스트의 결이 세대처럼 다층적으로 구성됐다는 점이다. 지난 시즌 무대를 지킨 김수하(미미역 ), 조권(엔젤 역), 정다희(조앤 역 ), 김수연(모린 역), 구준모(베니 역 ) 등이 작품의 골격을 안정감 있게 이끌고, 로저로 무대에 섰던 장지후는 이번에는 콜린으로 변주하며 새로운 존재감을 구축한다. 익숙한 배우들이 다시 무대에 서는 일은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렌트’라는 서사와 함께 자라난 이들의 시간이 무대에 축적되는 일에 가깝다는 걸 몸소 보여준다.
또한 이 시즌 처음 합류한 배우들은 작품에 신선한 빛을 더한다. 로저에 캐스팅된 이해준·유현석·유태양, 마크의 진태화·양희준, 미미의 솔지, 콜린의 황건하, 엔젤의 황순종, 모린의 김려원, 조앤의 이아름솔이 그 변화의 중심에 있다. 이들의 해석은 원작이 가진 자유분방함에 새로운 결을 입히며, ‘세대가 바뀌어도 이 작품이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를 증명한다.
2막의 문을 여는 ‘시즌즈 오브 러브’(Seasons of Love)는 ‘렌트’를 대표하는 곡으로, 작품을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도 익숙한 노래다. 1년이라는 시간을 숫자로 환산하며 인간의 삶을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사랑’에서 찾아낸다. 작품 전체의 메시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자 공동체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응축한 순간이다.
무대 구성은 복잡하지 않지만, 그 단순함이 오히려 인물의 감정과 음악이 중심으로 드러나는 구조를 만든다. 밴드 사운드와 배우들의 동선은 1990년대 이스트빌리지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면서도, 2025년 관객의 감정에도 직접 연결된다.
새롭게 로저와 미미로 무대에 오른 유태양과 솔지의 조합은 이번 시즌 ‘렌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지점 중 하나다. 유태양의 로저는 감정을 과잉으로 흘리지 않고, 메마른 표면 아래 끓어오르는 요동을 음악 속에서 또렷하게 보여준다.
또한 극 중 기타 연주 장면에서 그는 핸드싱크가 아닌 실제 연주를 선택했다. 무대의 음악적 연주 중심은 어디까지나 밴드가 담당하지만, 배우가 직접 연주를 수행하는 장면은 로저가 음악을 통해 버티는 인물이라는 설정을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만든다. 이 과정은 음악으로저의 세계가 어떻게 유지되고 무너지는지를 설명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솔지의 미미는 그가 마주해온 현실과 고통, 외로움에서 비롯된 결로 구축된 인물이다. 미미가 관계에 기대고 때로는 쉽게 흔들리는 이유가 삶의 무게에서 시작된 것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그 취약함을 화려함이란 외피 속에서 무대 위에 올린다.
‘라이트 마이 캔들’(Light My Candle)에서 두 배우의 합은 특히 돋보인다. 신중한 호흡과 대사의 박자는 인물들이 지닌 상처의 깊이를 반영하며 관계가 어떻게 형성될지 암시한다. 각각의 외로움이 부딪히고 맞물리면서 생기는 긴장과 균열이 인상적이다.
‘렌트’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관객의 삶으로 방향을 틀어선다.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무대는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비추는 장면들로 가득해지고, 상실·고립·다시 일어서려는 마음이 음악과 함께 서서히 번져 나간다. 인물들의 노래를 듣는 동안 우리는 미뤄두었던 질문과 마주하게 되고, 겨울 끝에서 스치는 온기는 대단한 희망이라기보다 지금을 버티며 살아낸다는 감각에 가깝다. 고립돼 있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닿는 순간 또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 흐름을 따라가면 ‘렌트’의 감정이 어느 특정한 시대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 놓인 청춘에게 이 질문이 여전히 닿는 이유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무대 위 인물들이 서로의 손을 붙잡는 장면에서 매번 새롭게 시작된다. 2026년 2월 22일까지 코엑스 아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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