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과 이종석, 86의 위험한 DNA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6.10 07:07  수정 2025.06.10 07:07

확고한 반미파 또는 주사파가 탄생

김일성의 ‘갓끈 이론’

대한민국 수립은 친일파가 주도…

대한민국은 정통성 없다는 이론 확산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인사브리핑에서 새 정부 첫 인사 발표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종석 국정원장 후보자,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 이 대통령, 강훈식 비서실장, 위성락 안보실장, 황인권 경호처장.ⓒ 대통령실

지난 6월 4일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총리와 국정원장에 각각 김민석과 이종석을 지명했다. 86 DNA의 핵심은 반미와 탈대한민국 역사해석이다. 김민석과 이종석은 각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1980년대를 공유했던 김민석과 이종석 그리고 이재명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80년 5.18 광주 이후 전두환 철권 통치에 숨죽이고 있던 학생운동은 85년경부터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이를 주도했던 것이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과 삼민투(삼민은 민주민중민족이고 투는 투쟁위원회의 머리글자)이고 당시 전학련 의장이 서울대 총학생회장 김민석이었다.


전학련과 삼민투는 대담하고 과감한 투쟁으로 정세를 주도했다. 돌과 화염병이 난무하기 시작했고 격렬한 가두 투쟁이 줄을 이었다. 그 정점에 있었던 것이 1985년 5월 23일 3일간에 걸쳐 벌어진 서울 미문화원 농성 사건이다.


학생들의 주장은 광주에서의 군부대 출동이 미국의 배후 조종·지원 아래 진행되었기 때문에 광주 양민학살에 대한 미국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국에서 확고한 반미파 또는 주사파가 태어났다. 이 반미파의 후예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주한 미국대사관 또는 미문화원을 타켓으로 시위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정청래 의원이 가담했던 89년 주한 미 대사관저 방화 미수사건이다.


세월이 흘러 반미 주장은 약화하였지만 국제정세에 대한 이단적인 해석으로 이어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반일이다. 김일성의 갓끈 이론이 있다. 한·미·일 군사동맹이라는 갓을 벗겨내기 위해서는 약한 고리인 일본을 공략해 한일관계를 파탄시키면 된다는 이론이다. 실제로 필자를 포함하여 80~90년대의 반일 운동이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었고 최근 기세를 떨치고 있는 반일론 또한 기저에는 80~90년대의 반미 성향이 내재하여 있다.


이종석은 탈대한민국 역사관을 정초한 인물 중 하나이다. 이종석은 성균관대 78학번으로 뒤늦게 공부를 했지만 86세대의 역사 재해석 작업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서 이종석의 청년 시절은 86세대의 집단의식과 관련을 갖고 있다.


70년대 중후반부터 대한민국 수립은 친일파가 주도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다는 이론이 확산하였다. 이 이론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으로 집대성되었다. 여기까지는 진보 운동권 전체가 공유했던 생각이다. 이종석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래서 북한에 정통성이 있으며 김일성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비약한다.


이종석의 이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김남식에 대해 알아야 한다. 김남식은 남파 공작원으로 전향하여 남한에 우호적인 활동을 했다가 80년대 후반 이래 태도를 바꾸어 노골적인 친북 활동을 한 인물이다.


김남식의 작업 중 대표적인 것이 남로당 재평가 작업이었다. 김남식은 남로당의 노선을 타협적이고 분파적이라며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이는 김일성을 띄우기 위한 우회적인 작업이었다. 나는 범민련 활동을 하면서 김남식과 대화를 할 수 있었고 김남식의 본심에 대해 간접적으로 들었다. 그것을 종합하면 김남식의 전향 자체가 위장이었고 남파 목적이 본래부터 한국 진보 좌익운동에서 남로당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김일성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김남식은 당시 진보적 인텔리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고 많은 후학을 양성했는데 이종석은 그 중 한 사람이다.


진보 운동권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북한에 정통성이 있다는 생각을 덧붙이면 그것이 다름 아닌 주사파이다. 이종석은 김일성 연구를 통해 그런 어름까지 다다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은 학생운동권에 몸담은 적이 없다고 알려졌지만 도처에서 학생운동권과의 독특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의 말과 논리 속에서 80년대 학생운동권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다음 경우이다.


“사실은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을 해가지고 다시 그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습니까?” (21년 7월 1일, 이육사 문학관에서).


상기 발언은 액면 그대로 86 운동권 사상의 핵심에 해당한다,


이재명 정권 출범 이후 미·중 관계가 격화되고 있다. 어설픈 실용주의나 중간적 입장은 설 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80년대로 이어진 이재명과 김민석·이종석 그리고 지금은 중년이 된 40~50대의 집단적 잠재의식이 국제정세와 맞물리며 중대한 시험대 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글/ 민경우 시민단체 길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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