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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㊶] 나, 이 영화 왜 지금 봤지…‘디 아워스’


입력 2021.05.10 06:00 수정 2021.05.10 06:57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영화 '디 아워스' 포스터 ⓒ이하 시네마서비스 제공 영화 '디 아워스' 포스터 ⓒ이하 시네마서비스 제공

OTT(Over The Top, 인터넷으로 영화, 드라마 등 각종 영상을 제공하는 서비스) 왓챠에 오른 영화 ‘디 아워스’에 ‘정연’이라는 분이 적은 소감이다. 간결하면서도 이 이상의 찬사가 있을까 싶은 살아있는 표현, “나 이 영화 왜 지금 봤지…”보다 나은 기사를 쓸 자신이 없지만 노력해 보려 한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디 아워스’(감독 스티븐 달드리, 수입 태원엔터테인먼트, 배급 시네마서비스, 2003)는 1999년 퓰리처상(소설 부문)을 받은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1925년 발표된 소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 3명의 여성이 주인공이다. 6월의 붉은 꽃들과 초록 잎들 사이로 부서진 햇살 아래, 세 여자의 단 하루 시간을 통해 인생을 통찰해 낸다.


영화에는 3가지 시점의 현재가 있고 각각의 주인공이 있다. 1923년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 1951년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흠뻑 빠져드는 미국 LA의 독자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 분), 소설의 내용이 현대에 현실로 옮겨진 듯 소설의 주인공 이름 클라리사를 그대로 지닌 2001년의 클라리사 본(메릴 스트립 분)이다.


세 여성은 마치 평행이론처럼 시대와 장소만 다를 뿐 죽음과도 같은 현실에서 질식할 것 같은 삶을 똑같이 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처럼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족함 없어 보이는 그들이지만, 세상에서 혼자인 것처럼 고독하다. 주변인들은 그들을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만, 남들보다 예민하고 섬세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지성을 갖춘 게 되레 일상의 평화를 방해한다.


병든 리처드(에드 해리스 분)의 생존 이유, 클라리사(매릴 스트립 분) ⓒ 병든 리처드(에드 해리스 분)의 생존 이유, 클라리사(매릴 스트립 분) ⓒ

게다가 그들은 성소수자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의 ‘섬’일 수 있는데, 버지니아와 로라는 20세기 초·중반의 인물이다 보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억누르며 살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고, 그럴 수 없다면 죽음을 원할 정도로 절박하다. 하지만 쉽지 않다. 버지니아에게는 자신을 감금에 가깝게 보살피는 남편 레너드가 있고, 로라에게는 세 살 난 아들 리처드와 뱃속의 딸이 있어 떠남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2001년에는 클라리사보다 그의 옛 애인이자 절친 리처드가 오늘을 버리고 싶어 한다. 맞다, 1953년의 귀여운 꼬마, 로라의 아들 리처드가 클라리사가 돌보는 남자다. 리처드는 소설에서처럼 시인이다. 클라리사가 열아홉, 리처드가 스물일 때 둘은 함께였지만 각자 성 정체성을 깨닫고 다른 길로 갔다. 세월이 흘러 리처드가 병에 걸려 인생의 허무에 힘겨워할 때 클라리사가 간호를 자처한 것이다. 리처드의 옛 애인들은 유령이 되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와 리처드를 얼싸 안온 엄마 로라(줄리안 무어 분) ⓒ 집으로 돌아와 리처드를 얼싸 안온 엄마 로라(줄리안 무어 분) ⓒ

현실 탈출을 꿈꾸는 버지니아, 로라, 리처드는 어떻게 됐을까. 어제는 되돌아섰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떠남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중 누가 더 행복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의 무게가 따른다. 때로 선택으로 얻은 기쁨보다 클 때도 있다. 모든 선택이 ‘굿 초이스’일 수는 없다, 때로 치명적 악수이기도 하다. 평행선처럼 서로 만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1951년의 로라가 2001년에 등장한다. 죽음과도 같은 현실 대신 삶을 택했을 뿐인데, 잔인한 결과를 마주한다.


줄거리를 말하지 않고 있다. 기막히게 얽힌 줄거리가 있기도 하고,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줄거리가 없기도 하다.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을 ‘의식의 흐름’에 따라 펼쳐내 현대 소설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그대로, 영화 ‘디 아워스’ 역시 줄거리보다 그 시간들(디 아워스)을 살아간 인물들의 심리가 중요하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소설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조금의 어색함 없이 옮겨 오면서도 종합예술인 영화로서의 매력을 더해 제60회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받았다.


인물들의 고독, 자신을 가두는 세상으로부터의 도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필립 글래스의 음악이 큰 몫을 한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로 불리는 그답게 피아노 선율로 인물들의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잔잔한 일상, 도발하듯 탈출을 감행하는 긴장감, 그리고 다시 돌아온 현실을 그려낸다. 스스로 1974년에 “내게 있어 미니멀리즘은 끝났다”라고 선언한 만큼 결코 단조로운 음률도 아니다. 마치 파도와 같다. 저 멀리서 차곡차곡 밀려와 해변에 이르러 커다란 산을 만들었다가 스러지는 한 번의 움직임은 웅장하지만, 파도는 디테일은 조금씩 달라도 큰 줄기는 같게 반복된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거나 계속해서 보면 끝없는 반복이 잔잔하게 느껴진다. ‘디 아워스’는 제56회 영국아카데미에서 안소니 아스퀴스상(음악상)을 받았다.


평범한 오늘이 고통인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에게 '내일'은 무엇일까 ⓒ 평범한 오늘이 고통인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에게 '내일'은 무엇일까 ⓒ

그리고 프레임 밖에 선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연출 의도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작곡가 필립 글래스의 오선 위에서 음표가 되어 춤춘 이들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에드 해리스(리처드 브라운 분)를 비롯해 호연을 펼친 배우들이다. 키드먼, 무어, 스트립은 제53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인 여자연기자상을 공동으로 받았다. 특히 실존 인물을 연기한 니콜 키드먼은 머리카락 색을 바꾸고 매부리코 분장을 붙여 버지니아 울프의 흑백 사진과 흡사한 외모로 변신했는데, 음색과 눈빛까지 바꾸니 ‘언제 나오는 건가’ 못 알아볼 정도로 인상적 연기를 펼쳤다. 골든글로브, 영국아카데미에 이어 미국아카데미까지 여우주연상을 독차지했다.


이슈가 터질 때 성별대립이 잦은 요즘이다. 여자들의 반란으로 곡해하지 말고, 성소수자에 국한된 이야기로 국한하지 말고, 누구도 내 속을 몰라줘서 고독하고 정신 차려보니 인생 벼랑 끝에 선 평범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오늘, 친구보다 깊게 나의 내면으로 들어와 나의 ‘고통’에 손 얹어줄지 모른다. 2% 부족하다면, 필립 글래스가 ‘디 아워스’를 위해 준비한 ‘Escape!’(벗어나!)를 들어보자. OST에는 13곡이 더 있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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