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홍종선의 올드무비㉔] 21세기 위대한 영화 1위 ‘멀홀랜드 드라이브’


입력 2020.12.28 13:53 수정 2020.12.28 13:55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 스틸컷 ⓒ수입·배급 감자 제공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 스틸컷 ⓒ수입·배급 감자 제공

영국 공영방송 BBC가 지난 8월 남극대륙을 제외한 전 세계의 신문, 잡지, 온라인 등에서 활동하는 36개국 영화평론가 177명이 참가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100선’을 선정해 발표했다.


한국영화는 ‘올드보이’(감독 박찬욱, 30위)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감독 김기덕, 66위), 단 두 편이 1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가운데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데어 윌 비 블러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 순으로 2~5위를 차지했다. 6~10위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 테렌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 카린 에크버그 감독의 ‘어떤 이혼’, 에단&조엘 코엔 감독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영광을 누렸다.


1위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였다. 2~10위에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발견하기 쉬웠을 텐데, 되레 1위는 낯설 수 있다. 컬트영화의 대가가 연출한 작품인 데다 영화를 보고 나도 명쾌하게 모든 장면을 해석하기 쉽지 않기에 지난 2001년 국내 개봉 당시 13,000명만이 관람했다. 그렇다고 평론가들이 뽑아서 그렇겠지, 하며 제쳐 둘 영화도 아니다.


재개봉 당시의 포스터 ⓒ 재개봉 당시의 포스터 ⓒ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 가능한 잘 짜인 퍼즐 맞추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좋고, 극장을 나오고 나서도 뭔가 나를 잡아당기는 여운이 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좋고, 꿈 얘기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좋고, 꿈을 현실에 등댄 또 다른 세계이며 그것을 통해 나와 우리를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어도 좋다. 한 번 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혹적 미덕을 지닌 영화를 놓치기란 아깝다. 한국 관객이 좋아하고 어떤 배역을 맡아도 매력적으로 소화하는 나오미 왓츠만 믿고 따라가도 영화는 즐겁다. 로라 해링이라는 육감적 배우와 나오미 왓츠의 합은 상상 이상으로 짜릿하다. 독특하게 아름다운 영상과 귓가를 감아 드는 음악, 뛰어난 스타일리스트 데이비드 린치가 보여 주는 형식미 역시 즐겨볼 만하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는 설명이 필요 없는 영화다. 두 가지 의미에서인데, 먼저 진정 백문이 불여일견인 영화이므로 직접 보는 게 낫다. 설명하려 애쓰면 추상적 단어의 열거이기 일수여서 실제로 보면 흥미로운 영화인데 자칫 난해하고 지루한 영화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설명이 필요 없는, 존재 그 자체로 명화다. 직접 보면 아는데 뭐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의 영화랄까. 그래서 이번 주 ‘올드무비’는 영화를 파헤치기보다 그저 필자가 해석한 줄거리를 얘기하려 한다. 맞거나 틀릴 수 있고, 당신과 생각이 같거나 다를 수도 있지만, 해석의 자유가 열려 있는 영화이니 무방하다. 사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관한 모든 것을 낱낱이 분석할 재주도 부족하다. 자, 이제 현실 할리우드 그리고 우리네 인생의 진실이 보이는 데이비드 린치의 꿈속으로 들어가 볼까.


꿈속의 리타, 현실의 카밀라 로즈를 연기한 배우 로라 해링 ⓒ 꿈속의 리타, 현실의 카밀라 로즈를 연기한 배우 로라 해링 ⓒ

미국 LA, 산타모니카로 향하는 구불구불 언덕진 길의 이름, 멀홀랜드 드라이브.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할리우드가 보인다. 영화는 깊은 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오르는 차의 내부에서 밖을 바라보는 전경으로 시작한다. 차에는 사내 둘과 여자가 타 있다. 배우로 보이는 여자를 강제 하차시키며 권총으로 위협하는 사내들, 때마침 교통사고가 발생하고 여자는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다. 산길을 가로질러 웨스트할리우드 주택가 한 빌라 마당에 숨어든 여자는 행운의 연속으로 혼자 사는 노년의 여자가 여행을 떠나는 틈을 타 집안으로 숨는다. 집주인의 조카 베티가 배우의 꿈을 안고 도착한다. 베티는 여자를 발견하지만 고모의 지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내 불청객임을 알게 되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렸음을 알고 고모 이웃의 만류에도 함께 지낸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여자, 겨우 리타라는 이름을 기억해 낸 길 잃은 여자를 위해 베티는 마치 형사라도 된 듯 리타에게 도움을 준다. 리타의 핸드백에는 거액의 돈과 파란 열쇠만이 들어 있다.


영화는 리타의 정체 찾기로 이어진다. 하나 더 떠오른 이름 ‘다이앤’이라는 단서 하나를 붙들고 추적을 이어간다. 끝내 다이앤의 주소를 찾게 되는데, 집 밖에는 잠복근무 중인 형사 둘이 있고 집 안에는 얼굴의 형상을 알아보기 힘든 시신만이 놓여 있다. 경악하는 리타의 입을 틀어막아 집을 나서는 베티. 자신의 정체를 알려줄 유일한 희망의 죽음 앞에 절망하는 리타, 사고 후 모든 걸 의존해 온 베티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새벽 2시, 자다 말고 하나의 장소가 생각났다는 리타, 베티에게는 뭔지 모를 주저하는 마음이 보이는데. 자신이 보살펴온 아가 새의 청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듯 베티는 리타와 함께 그곳으로 향하는데 실렌시오 극장이다.


실렌시오 극장ⓒ 실렌시오 극장ⓒ

실렌시오는 침묵이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마치 변사처럼 사회를 보는 남자는 이 극장에는 밴드가 없고 오케스트라가 없고 모든 음악과 소리는 녹음된 것이라고 안내한다. 그의 말조차 립싱크이다. 색소폰 연주자가 연주를 멈춰도 음악이 흐른다. 이어진 공연, 아메리카의 눈물이라는 이름의 가수가 로이 오비슨의 ‘Crying’(크라잉, 울음)을 부르는데 립싱크인 줄 알면서도 리타와 베티는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특히 베티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무엇인가 생각난 듯 가방을 열어 보면 파란 상자가 들어 있다.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 파란 상자를 꺼내놓는 베티, 부지불식간의 찰나, 베티가 보이지 않는다. 베티의 이름을 부르던 리타는 뭔가 떠오른 듯 베티의 제안으로 소지품을 숨겨 두었던 상자에서 파란 열쇠를 꺼낸다. 열쇠로 상자를 여는 순간 리타는 쓰러진다.


이어지는 주마간산 식으로 띄엄띄엄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베티는 다이앤 셀윈이라는 이름을 쓰고, 리타는 카밀라 로즈이다. 두 사람 다 배우이고 연인인데, 카밀라가 배우로서 앞서가고 다이앤에게 배역을 따주는 식으로 돕는다. 카밀라가 아담 케셔라는 감독의 눈에 들어 성공을 위해 다이앤을 배신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통해 도착한 파티장, 카밀라와 다이앤의 위상엔 큰 차이가 보인다. 배신감에 치를 떨던 다이앤은 한 남자에게 청부살인을 의뢰하며 거액을 돈을 건네고, 남자는 일이 끝나면 반드시 열쇠를 찾으라는 말을 남긴다. 홀로 남은 다이앤은 후회와 회한과 절망에 빠져 괴로워하다 자신을 책망하듯 덮쳐드는 노부부의 환각에 쫓겨 머리에 권총을 갖다 댄다. 이어지는 총성, 영화의 카메라는 실렌시오 극장으로 돌아와 실렌시오, 침묵을 읊조리며 끝이 난다.


다이앤을 떠나 아담에게로 간 카밀라, 그 현실ⓒ 다이앤을 떠나 아담에게로 간 카밀라, 그 현실ⓒ

이제부터의 얘기는 줄거리보다 훨씬 더 자의적 해석이다. 리타가 쓰러질 때까지가 다이앤의 꿈, 이후 빠르게 전개된 이야기가 현실이다. 스타가 되고 싶었던 다이앤은 배우가 되고 연인을 얻긴 했지만, 연인에게 기생하는 초라한 신세다. 배신감에 연인을 죽이려 하는데, 평범한 청부살인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꿈을 꾸게 해 주는 서비스다. 열쇠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2010)의 팽이처럼 꿈임을 잊지 않게 해 주는, 그래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토템이다. 다이앤의 꿈속에서 기억을 잃은 리타가 지닌 돈과 열쇠는 현실에서는 다이앤이 건넨 돈과 받은 열쇠다.


꿈속에서는 현실과 거꾸로인 일들이 많다. 현실에선 카밀라가 다이엔을 돕지만, 꿈에서는 다이앤이 된 베티가 카밀라 격의 리타를 돕는다. 리타는 베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꿈속 베티라는 이름은 현실의 다이앤이 청부살인을 의뢰하던 식당 윙키스의 웨이트리스 이름이다. 연인을 죽이는 다이앤이 꿈속에선 연인을 돕고, 현실에선 별 볼 일 없는 단역배우가 촉망받는 연기파 신예로 둔갑하는 꿈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셔터 아일랜드’(2010)에서 아내를 죽인 정신병자 앤드류가 연방보안관 테디로 자아를 바꿔치기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또 현실에서 아담은 잘나가는 감독이지만, 꿈에서는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여자 주인공 배역을 제작자 형제와 정체불명의 카우보이에게 압박당하고 이를 거부하자 파산에 직면하는 실패자로 나오는 것도 자신의 애인 카밀라를 뺏어간 다이앤의 꿈속 복수다. 꿈속에서 카밀라 로즈는 제작자를 등에 업고 아담 감독의 영화에 낙하산으로 떨어지는 배우이고, 감독은 카밀라를 넌덜머리 내는 것도 현실과 반대다. 꿈은 다이앤이 원하는 희망의 복합체니까.


꿈속 베티, 현실의 다이앤 셀윈을 연기한 배우 나오미 왓츠와 데이비드 린치 감독(왼쪽부터) ⓒ 꿈속 베티, 현실의 다이앤 셀윈을 연기한 배우 나오미 왓츠와 데이비드 린치 감독(왼쪽부터) ⓒ

영화에서 실렌시오 극장은 매우 중요한 장소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의 특성, 인생의 본질을 우리에게 말하는 곳이다. 우리가 영화가 허구임을 알고 보면서도 감동하고 웃고 울 듯이 실렌시오 공연 전체가 립싱크임을 알면서도 베티와 리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전부 진짜라고 믿는 현실도 시간이 지나면 영화보다 흐릿한 기억의 파편으로 남을 뿐이고, 우리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울고 웃는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무엇인 현실이고 무엇이 허상인가, 감독은 그 경계를 우리에게 묻는다.


또한, 실렌시오 극장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인생 본질을 깨닫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꿈속의 베티를 넘어 현실의 다이앤이 꿈임을 깨닫는 ‘찰나’를 만든다. 깨달음으로 점차 꿈속 세계에서 현실의 세상으로 의식이 넘어가는 다이앤, 꿈이 깨는 순간 꿈속 베티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꿈에서 깬 베티는 깊은 회한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생명을 잃어가는 다이앤의 꿈속에서 리타는 베티를 찾는다. 그리고 원래는 베티가 기억해 상자를 열어 무사히 현실로 돌아가야 했던 열쇠를 리타가 찾아 상자를 연다, 리타가 돌아갈 현실은 주검이다. 이 모든 것을, 인간들의 사랑과 배신, 기대와 절망을 모두 지켜보고 모두 담아내는 곳은 실렌시오 극장이다. 실렌시오 극장은 인간의 현실과 그에 등을 댄 꿈을 동시에 표현해내는 예술, 영화 그 자체이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다름 아니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연인들, 그것이 인생 ⓒ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연인들, 그것이 인생 ⓒ

지금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무것도 알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영화의 재생 버튼을 누르는 게, 당신의 감상과 해석의 시작이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관련기사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