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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넘는 중국-인도 분쟁의 뿌리


입력 2020.06.24 09:00 수정 2020.06.22 17:27        데스크 (desk@dailian.co.kr)

국경지역, 충돌은 석기시대(石器時代)의 다툼 연상케 해

대한민국 집권자들 돌 한개, 풀 한포기라도 지킬 각오 있나

ⓒ데일리안 ⓒ데일리안

최근 들어 중국과 인도 사이의 국경 분쟁(紛爭)이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14억명 안팎의 인구를 가진 두 대국(大國)의 충돌이라 세계가 주목한다. 게다가 두 나라는 모두 핵무기(核武器)를 보유하고 있는데도 국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충돌은 석기시대(石器時代)의 다툼을 연상시킨다.


지난 15일 저녁에는 돌과 못 박힌 몽둥이, 맨주먹으로 싸우고 심지어는 밀어서 계곡으로 떨어뜨리는 싸움을 한데 이어 중국은 급기야 각종 격투기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들로 구성된 부대를 분쟁 지역으로 파견한다고 한다. 앞으로 소림사 ‘쿵푸부대’나 터번을 쓴 ‘요가부대’가 생기는 건 아닌지 실없는 생각까지 든다. 총기를 사용하지 않고 싸우는데도 양측에서 수십 명씩 사망자[전사자]와 부상자가가 나는 것을 보면 역시 싸움은 싸움이다.


이 싸움은 중국과 인도 사이 3,500km에 이르는 국경선 가운데 서쪽 부분에서 발생하고 있다. 카슈미르(Kashmir)지역이다. 이 지역은 1947년 인도가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할 때, 힌두교도들은 인도(India)로,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Pakistan)으로 분리돼 각각의 독립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분쟁 지역이 됐다. 영국은 500개 이상의 토후국(土侯國)으로 나눠져 있는 식민지 인도에 대해 각 토후국 왕들이 인도나 파키스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는데, 문제는 ‘잠무 카슈미르 토후국’의 경우, 주민의 80% 이상이 이슬람인데도, 토후국 왕이 인도를 선택하면서 분쟁이 시작됐다.


파키스탄은 ‘잠무 카슈미르’ 주민 대다수가 이슬람이니까, 당연히 자국 영토가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힌두교도인 토후국 왕이 인도를 선택하자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며 지금까지 인도와 3차례(1947, 1965, 1970)나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카슈미르 지역 22만㎢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다투는 지역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중국이 끼어들면서 더 복잡해졌다.


1962년 인도-중국 국경전쟁이 발생하기 전 카슈미르의 악사이친(Aksai Chin) 지역 38,000㎢는 중국과 인도가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도 버려둔 지역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국경전쟁에서 이긴 이후, 이 지역은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고, 인도와는 실질통제선(LAC, Line of Actual Control)이라는 이름의 국경선을 그어놓고 관리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1963년 중국과 맺은 협정에서 악사이친 지역을 중국의 영토라고 인정한 뒤 빠져버렸다. 이제 카슈미르 분쟁은 ‘인도-파키스탄’ ‘인도-중국’, 이렇게 두 개의 전선(戰線)이 형성돼 있고, 최근의 충돌은 인도-중국 전선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


이 지역은 보통 험지가 아니다. 히말라야, 카라코룸, 쿤룬산맥 등 세계의 지붕(Roof of the World, High Asia)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평균 고도가 4,000m가 넘어 거주자나 지나 다니는 사람도 드문 지역이다. 인도와 중국은 지난 1996년 국경 지대 군인들의 잦은 충돌이 큰 싸움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실질통제선(實質統制線)을 따라 2km 폭의 공간을 설정하고 이 비무장지대에는 총기류 휴대를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핵무기를 두고도 석기시대 같은 싸움을 계속하는, 긴장 관리에는 일가견이 있는 나라들이다.


하지만 지난 15일의 충돌에서 중국측이 ‘못 박힌 몽둥이’ 같은 비인도적 흉기를 사용해 인도 군인들을 살상(殺傷)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인도측 분위기는 상당히 격앙됐다. 인도 국방부는 22일 현지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총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쪽으로 교전 규칙을 바꾸기로 해 앞으로 더 큰 유혈 충돌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카슈미르는 ‘서부 전선’의 상황이고, 동쪽 국경으로 옮겨가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지난 2012년 인도 북부 시킴(Sikkim)주(州) 도클람(중국에서는 둥랑, 인도에서는 도카라)에서 인도군 초소(벙커) 두 개가 중국 영토에 설치됐다며, 중국군이 이 초소 2개를 불도저로 밀어 버려 두 나라가 대치했고, 2017년에는 중국이 도클람 지역에 군용(軍用)도로 개설에 착수하자 인도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막으면서 수천 명의 양국 군인들이 두 달 이상 산중에서 대치하기도 했다.


더 동쪽으로 가면 인도 아루나찰프라데시(Arunachal Pradesh)주(州) 9만㎢를 둘러싼 문제가 있다. 중국은 이 아루나찰프라데시를 ‘남(南)티베트’라고 부르면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 땅은 티베트(1750년부터 청 보호령)와 영국[인도]이 1914년에 맺은 심라조약(Simla Convention)에 근거해 인도 영토가 됐다. 중국은 이 조약이 불평등 조약으로서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비해, 인도는 자기들에게 유리한 이 조약을 굳게 지키고 있다.


1912년 청(淸)이 멸망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ROC)이 건국되자 1913년 티베트는 독립을 선언한다. 당시 인도를 식민 통치하고 있던 영국은 티베트(Tibet)에게 호의를 보여, 독립 티베트와 중화민국 사이에 새 국경선 획정 등 티베트의 위상(位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3자 회담을 1914년 봄 인도총독부의 여름 행정 수도인 심라에서 주선했다. 이 때 영국이 제안한 내용은 내.외 몽골과 비슷한 개념이다. 티베트를 ‘외(外)티베트’와 ‘내(內)티베트’로 나눠, 현재의 티베트자치구에 해당하는 ‘외티베트(Outer Tibet)’는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되 자치를 허용하고, 지금의 칭하이, 깐수, 스촨성 일부 지역은 ‘내티베트(Inner Tibet)’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중화민국 전권대표[이반 첸]는 영국의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조인을 거부하고 회담장을 떠나버린다.


중화민국-티베트의 국경 획정(劃定)은 무산됐으나, 티베트의 남쪽 국경 즉 인도와의 국경선은 새로 그었다. 당시 티베트 대표[론첸 샤트라]는 갓 독립을 선언한 티베트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면서 영국[인도]쪽에 유리하게 국경선이 획정된 지도에 서명하게 된다. 이 국경선이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이다. 심라 회담에서 영국 대표를 맡았던 헨리 맥마흔 경(卿)은 당시 인도총독부의 외교 책임자였고, 그 뒤 카이로총독부의 최고행정책임자로 근무하면서 ‘맥마흔 선언’(McMahon-Hussein Correspondence)의 당사자가 된다.


중국(PRC)은 1950년 다시 티베트를 합병한 뒤, 심라조약을 인정할 수 없다며 인도에 대해 아루나찰프라데시 9만㎢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인도가 줄 리가 없다. 1962년 양국의 국경 전쟁은 서쪽의 악사이친 보다 동쪽의 이 땅이 더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좀 복잡하다. 그렇지만 본질은 하나다. 인도도 중국도 내 땅은 한 평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남북 관계와 한일 관계가 거칠어지는 지금, 대한민국의 집권자들도 돌멩이 한 개, 풀 한포기라도 지킬 각오가 돼 있는지, 또 그런 결기를 국민들에게 요구할 자신이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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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강성주 전 포항MBC 사장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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