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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경제다] "집중 투표제 의무화하면..." 투기자본 앞에 경영권 '무장해제'


입력 2020.04.23 05:00 수정 2020.04.22 16:54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민주당, 집중 투표제 의무화·다중대표소송제·집단소송제 당론으로 추진

상법 개정시 투기자본 '먹튀'에 국내 기업 속수무책

2019년 10월 22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 2019년 10월 22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

지난해 2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은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들에 총 7조원의 배당금과 자신들이 추천한 사외이사 선임을 요구하며 노골적인 ‘등골 빼먹기’에 나섰다.


다행히도 그해 3월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 주주총회에서 고액 배당과 사외이사 추천 등 엘리엇 주주제안이 모두 무산됐고, 목적 달성에 실패한 엘리엇은 막대한 손실만 떠안은 채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지분을 매각하고 철수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투기자본들이 우리 기업들의 등골을 빼먹는 일이 한층 수월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문재인 정부가 이른바 ‘경제 민주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우리 기업들의 경영권을 ‘무장해제’하는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데 혈안이 돼 있고, 지난 4·15 총선을 통해 ‘거대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에 무소불위의 권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 계류 중인 법안들 중 기업 활동을 제약하는 규제 법안은 130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집중 투표제 의무화와 다중대표소송제, 집단소송제 등의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으로, 모두 대주주의 지배력을 낮추고 지배구조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국내 대부분의 기업들이 대주주 중심 지배구조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법 개정안으로 대주주 지배력이 약화되면 외국계 투기 자본으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재계의 공통적인 우려다.


이들 법안은 민주당이 당론으로 추진해 왔으며, 일부는 이번 총선 공약에도 포함된 상태라 국회 의석의 5분의 3인 180석을 확보한 민주당 및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들 법안을 21대 국회에서 패스트 트랙에 태울 수 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 투기자본 '먹튀' 부추겨...칼 아이칸 KT&G 1500억 먹튀 사례 재현될 수도


이들 중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엘리엇으로 하여금 다시 현대차에 군침을 흘리게 만들 정도로 투기자본 친화적인 법안이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이사진을 선임할 때 1주당 1표씩 의결권을 주는 방식과 달리, 선임되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를테면 주총에서 3명의 이사를 선임할 때 후보자가 4명 나왔다면 주주들은 4명의 후보자들 중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후보자에게 4표를 몰아줄 수 있게 된다.


현행 법안은 주주제안으로 집중투표를 청구하더라도 정관으로 집중투표 배제가 가능하지만, 민주당은 정관으로 집중투표를 배제할 수 없도록 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명목상으로 소액주주 보호를 목적으로 하지만, 재계에서는 실질적으로 소액주주보다는 2~3대 주주, 투기펀드 등이 대주주의 경영권을 공격하는 용도로 악용될 우려가 클 것으로 보고 있다.


현실적으로 소액주주들이 이 제도를 활용하기 위해 표를 규합하는 게 어려운 반면, 일정 지분을 확보한 외국계 헤지펀드들은 표를 몰아 자신들의 이익에 충실한 인물을 경영진에 투입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외국계 헤지펀드가 경영에 참여할 경우 단기적으로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기업의 정책 결정에 압력을 넣은 뒤 막대한 이익을 빼먹고 지분을 매각하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집중투표제가 기업을 어떤 위기로 몰아넣는지는 과거 KT&G가 ‘기업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친 칼 아이칸으로부터 치명적인 ‘먹튀’를 당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칼 아이칸은 지난 2006년 KT&G 주식 5.69%를 매입한 뒤 정관상 집중투표제를 활용해 이사회 진입에 성공한 뒤 경영진에 보유 부동산 매각을 통해 배당을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KT&G는 당시 부동산 매각은 하지 않았지만 2조8000억원을 배당금으로 써야 했다. 칼 아이칸은 1500억원의 차익을 거두고 그해 12월 KT&G 지분을 매각했다.


배당 확대는 다른 주주들에게도 이익이 되지만, 투자와 배당의 적절한 배분 없이 배당에 집중할 경우 기업의 중장기적인 성장 전략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와 같은 대기업이 이같은 공격에 노출될 경우 국가 경제에도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주가가 폭락해 기업들의 방어 여력이 취약한 상황에서 집중투표제 의무화로 ‘무장해제’가 이뤄진다면 투기자본 앞에 우리 기업들을 먹잇감으로 내주는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단기 차익을 올리는 게 목적인 외국계 투기자본에게 해당 기업의 중장기 전략은 관심 사안이 아니다”라며 “배당 위주의 정책결정 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기업의 투자자금이 고갈되건 말건 이익을 챙겨 떠나는 게 투기자본의 생리고,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그걸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중대표소송제, 집단소송제 도입시 기업 경영활동 위축, 불확실성 심화 우려


민주당이 총선 공약으로 내세운 다중대표소송제와 집단소송제 역시 기업들의 경영권을 흔들 수 있는 법안들이다.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 주주가 불법 행위를 한 자회사, 혹은 손자회사 임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로, 모회사 주주들의 자회사에 대한 지나친 경영 간섭을 야기함으로써 독립적인 경영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돼 왔다.


이 제도 도입시 자회사 이사의 책임부담 증가로 자회사 경영활동이 위축될 수 있으며, 단기수익을 노리는 투기자본이 모회사 지분을 취득해 자회사의 경영 개입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정부가 코로나19 사태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기업들의 투자를 독려하는 상황에서 다중대표소송제는 기업 경영진의 발에 족쇄를 달아 투자를 위축시키는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집단소송제는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을 경우 일부 피해자가 소송에서 이기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라도 동일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이는 소비자 권익을 강화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반작용으로 기업들은 심각한 불확실성에 시달려야 한다.


미국 다우코닝이 1992년 실리콘 유방보형물 유해성 문제로 집단소송을 당해 패소하면서 42억5000만달러(약 4조7000억원)의 합의금을 물어낸 뒤 1995년 파산한 사례는 집단소송제의 대표적인 부작용으로 꼽힌다.


단 한 번의 실수가 기업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으로, 집단소송제가 법제화될 경우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다우코닝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재계는 거대 여당을 등에 업은 정부가 ‘경제 민주화’라는 정치적 이념보다는 ‘경제 살리기’라는 현실적 의무에 집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조동근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정부는 주가와 환율 동향, 신용전망 등 우리 기업들의 몰락을 경고하는 적신호가 켜지는 상황을 주시해야 할 것”이라며 “지금 상황에서 정부가 경제민주화의 아집을 버리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는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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