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 프로야구 사상 첫 2000안타 위업 달성
시련의 계절을 이겨낸 값진 산물…멈춤은 없다
‘딱’ 소리가 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두산 중견수 이종욱에게 향했다. 라이너성으로 뻗어나간 타구는 이종욱 앞에 뚝 떨어졌다. 안타였다. 언제나처럼 1루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던 타자는 안타임을 확인하고는 두 팔을 살짝 들었다 놓았다. 이내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퍼졌다. ‘살아있는 전설’ 양준혁(38·삼성 라이온즈)이 대망의 개인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김평호 1루 코치와 포옹하고 선동렬 감독으로부터 축하의 꽃다발을 받자 양준혁은 비로소 2000안타 달성을 실감했다. 소속팀 삼성 선수단은 물론이고 두산 선수단과 잠실구장 모든 관중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사나이 양준혁의 눈가에도 땀으로 둔갑한 이슬이 맺혔다. 26년째를 맞아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2000안타가 탄생한 2007년 6월9일 잠실구장은 그 순간이 바로 역사였다.
2000안타는 그냥 2000안타가 아니다. 타고난 천재성과 꾸준한 노력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아야 이룰 수 있는 대기록이다. 어느덧 프로 15년차 베테랑 선수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양준혁은 타석에 들어서 투수를 상대할 때마다 첫사랑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투수 앞 땅볼을 치고도 1루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양준혁은 적어도 야구에 있어서는 어린아이 같은 동심을 가진 선수다. 이처럼 야구에 대한 사랑과 의지에 꾸준함까지 받쳐줬기에 2000안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양준혁은 언제나 꾸준했지만 그의 야구인생에는 예기치 못한 고난과 시련이 많았다. 2000안타를 달성하는 그 순간, 양준혁의 뇌리에는 위업을 이룬 기쁨과 함께 지난날의 아픔이 파노라마처럼 흘렀다. 결코 평범할 수 없는 2000안타는 그래서 더욱 빛났다.
▲ 그에게 닥쳤던 불의의 시련들
양준혁의 2000안타가 더욱 빛나는 이유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까지 마치며 24살의 나이에 데뷔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인생사에서 ‘만약’이란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지만, 양준혁이기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프로에서 5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매우 크다. 양준혁은 몇 년 전 인터뷰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프로에 직행하지 않을 것을 후회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1988년 대구상고(현 상원고)를 졸업한 양준혁은 박영길 당시 삼성 감독을 만나 입단을 타진했다. 그러나 당시 삼성에는 박승호·이종두 등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박 감독은 양준혁에게 대학에서 경험을 쌓을 것을 권고했다.
대학 진학할 때만 하더라도 양준혁은 4년 후 삼성 입단을 철석같이 믿었다. 서류 명목상 도장을 찍거나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양준혁의 마음 속 깊은 진심은 이미 삼성의 파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서울지역 대학으로 진학할 수도 있었으나 대구지역 영남대로 진학한 것도 모두 삼성에 대한 사랑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방망이 돌리는 솜씨를 인정받은 양준혁은 영남대에서 공수주 삼박자를 두루 갖춘 대형선수로 발돋움했다. 젊은 시절 양준혁의 몸은 비교적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편이었다. 어깨도 꽤 강했다. 양준혁은 대학에서 더욱더 무서운 선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엄청난 시련이 양준혁에게 닥쳐오고 있었다. 1992년 1차 지명에서 삼성이 양준혁이 아닌, 그의 대구상고 동기 김태한을 지명한 것이다. 당시 삼성은 왼손 투수 자원이 부족했고, 빠른 공을 던지는 왼손 유망주 김태한은 분명 끌리는 재목이었다. 무엇보다 삼성은 타자보다 투수가 필요했다. 양준혁은 큰 배신감을 느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2차 지명에서 쌍방울과 OB의 오퍼를 모두 거부했다. 그리곤 상무에 입대했다. 삼성의 파란 유니폼을 입고 대구구장을 누빌 생각에 설렌 마음으로 맞이했던 1992년, 양준혁에게 주어진 것은 파란색 유니폼이 아니라 카키색 군복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시련이 미래에서 양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삼성 유니폼을 입은 후 6년간 양준혁은 삼성 타선에서 우뚝 솟은 최정상의 산처럼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특히 1998년에는 타격 1위(0.342), 최다안타 1위(156개), 홈런 5위(27개), 타점 5위(89개), 출루율 1위(0.450)에 오르며 최절정의 타격 감각을 뽐냈다.
그러나 시즌 후 삼성이 그에게 보답한 것은 연봉인상이 아니라 해태로의 트레이드였다. 삼성은 1990년대 고질적인 문제였던 마운드 보강을 위해 당대 최고 마무리투수 임창용을 영입하길 원했고 그 과정에서 양준혁을 포기했다. 오직 삼성을 위해 고졸 프로직행을 포기하고 입단시기를 늦춘 것이 한순간에 허사가 되는 그 순간, 양준혁은 절망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양준혁에게는 좀처럼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2000년 LG로 이적한 뒤에는 선수협의회 파동의 주범으로 내몰려 팀 내에서도 운신의 폭이 좁았고, FA가 된 후에는 선수협의회 주동자로 낙인찍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2002년 어렵사리 삼성으로 컴백한 뒤에는 생애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누렸으나, 양준혁 개인적으로는 데뷔 후 처음으로 타율이 2할대(0.276)로 추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FA 실패 사례 리스트에 오르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2005년에는 데뷔 후 최악의 타율(0.261)을 기록하며 암암리에 은퇴소문까지 나돌았다. 물론 프로선수치고 시련을 겪지 않은 선수는 없겠지만, 양준혁이 대선수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유독 시련이 많은 편이었다. 그것도 가슴 속 진정을 후벼 팔만큼 아픈 시련들이었기에 양준혁 본인이 겪었을 아픔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 시련은 이겨내라고 있는 것
인생에서 시련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시련은 더욱 겁나고 힘들다. 그러나 시련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사뭇 대조적이다.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시련을 이겨내고 다시금 우뚝 서는 사람들도 있다. 야구선수로서 수많은 시련을 겪고도 오늘날 이 자리에 올라선 양준혁은 당연히 후자의 경우. 양준혁은 시련이 닥칠 때마다 이겨냈다. 그에게 시련은 주저앉히게 만드는 쇳덩이가 아니라 그것을 이겨내고 더욱 강하게 만드는 하나의 촉매제였다. 양준혁이 15년간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1998년 12월의 트레이드 충격은 양준혁을 눈물짓게 만들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1999년 해태에서 양준혁은 타율 0.323·32홈런·105타점·21도루로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다. 물론 1999년은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고투저 시즌이었지만, 해태에서도 양준혁은 변함없이 양준혁이었다. 삼성에 대한 악감정이 남을 법도 했지만 그는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구구장을 찾은 첫 날, 외야의 어린이 관중들에게 준비한 사인볼을 나눠주기에 바빴다. 양준혁이 나눠준 사인볼은 삼성의 것이 아니라 해태의 것이었지만 어린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련을 딛고 일어선 양준혁은 해태 유니폼을 입고 있어도 대구의 영웅이었다.
2000년 LG로 이적한 뒤에도 양준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구구장과 광주구장 등 규모가 작은 구장들을 홈으로만 쓰다 가장 규모가 큰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게 됐지만, 장타에 의존하는 거포보다는 안타와 볼넷을 통해 출루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사실상의 중장거리 타자였던 양준혁에게는 크게 문제될 게 아니었다. 실제로 양준혁은 2001년 LG에서 타격왕(0.355)과 함께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녹슬지 않은 타격 실력을 뽐냈다. 사실 LG 시절 양준혁은 선수협의회 문제로 그라운드 안팎에서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했다. 하지만 그는 그라운드에서 오직 타격 실력 하나로 모든 시선을 잠재워버렸다. 보이지 않는 무소불위의 힘도 녹색 그라운드의 양준혁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삼성 이적 후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으나 이번에는 신체나이의 노쇠화로 시작된 시련이 닥쳤다. 2002년의 경우는 FA 계약 여파에 따른 겨우내 훈련 부족 탓이라 할지라도 2005년의 부진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배트스피드는 예전만 못했고, 특유의 오픈스탠스는 허점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여느 노장 타자들이 어려워하는 것처럼 몸 쪽 공에도 대책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양준혁은 고집을 부르는 대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변화를 받아들였다. 극단적인 만세타법을 버리는 승부수를 던진 것. 내딛는 오른쪽 발을 안쪽으로 끌어당겨 타격의 정확도를 높이는데 주력했고, 언제나처럼 1루를 향해 질주했다. 한 경기, 한 타석, 한 순간마다 집중한 결과는 화려한 부활이었다. 양준혁은 정점을 지난 베테랑 선수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변화의 시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 그에게 멈춤은 사형 선고다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가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자 여기저기서 대선수의 은퇴시기를 놓고 말이 많다. 비단 박찬호뿐만 아니라 국내무대를 누비고 있는 노장선수들에게도 ‘은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불과 3년 전까지 양준혁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 요지였다. 어느 선수에게든 은퇴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그냥 내뱉는 은퇴라는 말이 깃털처럼 가벼운 것에 비해 당사자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그만큼 은퇴는 선수들에게는 민감한 단어다. 물론 나이는 숫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양준혁에게 은퇴는 말도 안 되는 말이다. 멈춤은 그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양준혁에게 은퇴가 사형선고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바로 야구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양준혁은 혼자 살지만, 생활에 있어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야구 생각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야구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는 것과도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양준혁은 그만의 확고한 타격 철학을 갖고 있으며 독학으로 끊임없이 연구한다. 만세타법을 개발하고 포기하는 과정 모두 양준혁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준혁의 타격에 대한 이론적이고 기술적인 분석은 향후 코치 및 감독이 되어서도 기대가 되는 대목이다. 게다가 올 시즌을 준비할 때도 양준혁은 방망이를 잡은 후 처음으로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에 전념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부활에 성공한 지난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체력적인 한계를 겪고는 스스로 야구에 대한 고픔을 느낀 것이다.
15년에 걸쳐 2000안타라는 전인미답의 고지를 밟았지만 양준혁에게 2000안타는 종점이 아니라 종점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정거장일 뿐이다. 양준혁은 지난 5일 대구 롯데전에서 통산 1993안타를 기록한 후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도 1007개나 남았어요.” 양준혁의 초점은 이제 2000안타가 아니라 3000안타를 향하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50여년의 역사가 앞선 일본프로야구에서도 3000안타는 재일동포 출신 장훈(3085개)이 유일하다. 물론 3000안타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목표가 있어야하고, 양준혁도 자신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을 뿐이다.
팀 승리와 함께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야말로 선수로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손등이 붓고 유니폼이 찢어져도 멈추지 않는 양준혁이라면, 3000안타는 저 멀리 달나라 꿈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일 수 있다. 2000안타든, 3000안타든 어디까지나 숫자일 뿐, 양준혁이 그라운드에서 흘린 땀방울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다. 팬들의 가슴에 남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진정이다. 양준혁은 그 진정을 진정으로 따르는 진정한 프로선수다. 그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2000안타가 더욱 값지게 느껴지는 진정한 이유다.
☞ 두산, ´의외 아닌 의외´…매년 기대이상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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