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이명박-손학규 “내 일생의 3대 사건은...”

이충재 기자 (cjlee@dailian.co.kr)

입력 2007.02.07 08:54  수정

<데일리안 대선기획>한나라당 ‘빅3’, 이것이 다르다<6>박 “나, 아버지, 어머니 테러”

이 “어머니, 중학교 선생님, 정주영 만남”, 손 “민주화운동, 영국유학, 민심대장정”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 손학규 전 경기지사 등 ‘빅3’는 대권주자로 평가되기까지 저마다 삶의 역경을 뚫고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꿈꾼다’는 대선무대에 주인공으로 올라서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왔을 터.

이들에게 ‘일생의 3대 사건은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다. 답변엔 이들의 수많은 인생의 굴곡들이 고스란히 담겨 나왔다.

생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모습
“테러. 테러. 테러.”=박 전 대표는 자신의 ‘일생 3대 사건’에 대해 “어머니 테러로 서거, 아버지 서거, 나의 테러”라고 답했다.

박 전 대표가 살아온 길은 극적인 상황의 연속이었다.

1952년 6.25전쟁 중 태어나 군인의 딸로 평범하게 자랐던 박 전 대표는 초등학교 시절인 1964년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따라 청와대에 들어갔다.

10여년을 대통령의 딸로 살아온 그에게 1974년 8·15 광복절에 울린 총성은 삶의 방향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그가 꼽은 첫 번째 ‘일생의 사건’이다.

박 전 대표는 당시 22살의 나이에 총탄에 쓰러진 육영수 여사의 역할을 대신했다. 대통령의 딸에서 퍼스트레이디로 옷을 갈아입은 순간이다.

그는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외국인사들과의 회담을 직접 통역하는 등 외교 감각을 익혔다. 또한 국정운영을 경험하는 등 대선 ‘선행학습’을 했다.

그의 두 번째 일생의 사건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에도 박 전 대표는 평상심을 잃지 않고 “전방은 괜찮습니까”라고 물은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18년 후 정치인으로 돌아온 그는 1998년 대구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는 2004년 당 대표로 당선된 이후 각종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정치인으로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2006년 5.31지방선거 유세현장에서 피습을 당해 3시간 동안 60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가 꼽은 ‘마지막 사건’이다.

1989년 1월 ‘한소 경제협력위원회’구성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정주영 현대회장과 이명박 전 서울시장
“어머니, 중학교 선생님, 정주영 회장을 만난 것”=이 전 시장은 일생의 3대 사건으로 “좋은 어머니를 만난 것, 중학교 선생님의 야간고등학교 입학 권유, 정주영 회장을 만난 것”을 꼽았다.

이 전 시장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많이 배우지 못하시고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지혜롭고 강인하신 분이셨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금은 어렵지만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셨다. 또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가르쳐 주셨다”고 소회했다.

모친은 이 전 시장이 고려대 재학 시절 6ㆍ3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반년 간 복역하다 석방된 1964년 겨울 작고했다.

두 번째 사건으로 꼽힌 ‘중학교 선생님의 야간고등학교 입학 권유’는 학비가 없어 ‘중졸’에 그칠 뻔한 이 전 시장을 고등학교 입학에 이어 대학까지 진학해 학업을 이어 갈 수 있게 한 계기가 됐다.

이 전 시장은 이에 대해 “중학교만 졸업하고 학업을 중단할 상황이었는데, 선생님의 적극적인 권유로 야간상업고등학교 시험을 치르게 됐다”면서 “선생님이 권유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갖게 되었고 제 때는 아니지만 그 졸업장이 있었기에 대학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에 대해선 “그분 같은 큰 기업가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28세의 나이에 이사로 승진, 35세엔 사장까지 맡는 등 기업가로서 승승장구를 했다.

그는 이어 “현대에서 내가 겪었던 고 정주영 회장은 서민적 이미지의 소유자였다”면서 “정 회장은 많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만나길 좋아했으며 사람들에게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고 소회했다.

또한 “요즘도 가끔씩 시내거리를 거닐다가 포장마차가 보이면 정주영 회장의 소박한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면서 “사람들은 포장마차에서 만나는 대기업 총수를 신기해하면서도 더 없이 반가워하곤 했다. 그 모습은 바로 소박한 이웃집 할아버지였으며 아저씨의 모습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2006년 10월 9일 ´민심대장정´ 일정을 모두 마무리 하고 최종 도착지인 서울역으로 가기 위해 부산역에서 기차에 오른 손학규 전 경기지사
“민주화운동, 영국유학, 민심대장정”=손 전 지사는 자신 ‘일생의 3대 사건’으로 “민주화 운동 시절의 경험, 1980년 영국유학, 민심100일 대장정”을 꼽았다.

손 전 지사는 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에 대해 “경찰의 수배를 받았는데 어머님이 암으로 입원하셨다. 경찰의 눈을 피해 병실에 찾아가 아내에게 받은 돈 3만원을 드렸지만 어머님은 ‘빨갱이 돈 아니냐’며 나를 병실 밖으로 내쫓았다. 나중에 아내에게 받은 그 돈이 어머니가 건넨 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속으로 눈물을 훔쳤다”고 회상했다.

손 전 지사는 이어 “나는 결국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긴 수배생활…, 하지만 수배생활은 어머니 장례식장에 참석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면서 “당시 정보국, 치안국, 시경, 보안대 등 7대의 지프차가 어머니의 장례행렬을 뒤따랐다. 나는 어머니를 땅에 묻고 내려오는 그 아픈 가슴을 안고 경찰에 연행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어 두 번째 사건으로 꼽은 영국유학에 대해 “1980년 ‘서울의 봄’을 뒤로 하고 떠난 영국유학은 세계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포용하는 크고 밝은 안목을 키울 수 있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투쟁으로만 살아온 터라 ‘이제는 머리를 좀 채우고 싶다’는 심정이었다”면서 “세계는 크게 변하고 있는데 우리만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세계를 알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1988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을 때 가장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고 돌아봤다.

그는 또 “민심대장정을 통해 너무나 순박하고 자기 삶에 열심인 대한민국 사람들을 만났다”면서 “정말 많은 땀을 흘렸고, 너무나 진한 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울러 “국회의원이나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지사 시절은 자연스런 생활의 연장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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