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사적지…만세고개·아우내장터·매봉산

이소희 기자

입력 2015.02.26 14:31  수정 2015.02.26 14:40

국토지리정보원, 3·1절 인물·지명 분석 통해 독립운동 발자취 새겨

국토지리정보원(원장 최병남)이 3·1절을 맞아 만세고개, 아우내장터 등 3‧1운동이 전개된 전국의 사적지 지명을 분석했다.

지리정보원에 따르면 3·1운동과 관련된 지명은 탑골공원, 보신각 등 전국 곳곳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의 침탈에 맞서 전국적으로 일제히 항일운동이 전개됐던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3·1운동 자체가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에 위치한 ‘만세고개’는 3·1운동 당시 이 고개에서 원곡면 주민 1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펼쳐 지명이 유래됐다.

3·1만세운동의 중심지였던 서울특별시의 보신각, 학생단이 주최해 만세시위가 펼쳐진 남대문역전을 비롯해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계의 옛 교육기관이 있었던 장소들도 3·1민족운동의 산실로 기록돼 있다.

또한 지리정보원은 3·1운동으로 체포돼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삶과 독립운동 발자취를 지명을 통해 흥미롭게 풀어냈다.

충청남도 천안시 유관순 열사의 생가를 비롯해 유관순 열사가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병천면 ‘아우내장터’와 ‘매봉산’ 등도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뜻 깊은 지명이다.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병천(並川)지역은 백전천과 갈전천의 두 물길이 어우러지는 곳이라 해 ‘아우내’라 부른데서 유래됐으며, 유관순 열사가 독립만세를 부르던 아우내 장터에는 이러한 옛 지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용의 머리를 닮은 마을에서 태어난 여자아이 ‘유관순’

용두리마을(브이월드) ⓒ국토지리정보원
유관순 열사는 1902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지령 마을에서 태어났다.

용두리(龍頭理)의 지형을 살펴보면 하천이 구불구불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모양이 마치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명이 유래됐다. 용은 전통적으로 절대적인 힘을 상징하는 존재로 신성시 됐고, 지령(地靈)이라는 마을 이름 또한 물이 돌아흘러 인물이 많이 난 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때문인지 어린 시절의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열사가 어려서부터 밝고 씩씩하고 한글을 혼자 깨칠 정도로 영특했다고 전해진다. 유관순 열사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라 서울의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3·1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에 이 곳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독립 만세 운동의 시작을 알린 ‘매봉산’

용두리 마을에 있는 매봉산은 유관순 열사의 생가 뒤에 자리 잡은 산으로 3·1운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사 일을 앞둔 자정, 유관순 열사는 이 산에 올라 봉화를 지펴서 만세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매봉산은 독립운동의 봉화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역사적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지명이다.

매봉산이라는 지명과 관련해서는 매가 많이 날아들었다는 일부 주민의 고증이 전해지기도 하고, 산의 순 우리말인 ‘뫼’와 같은 의미라는 유래가 전해지기도 한다.

당시 거사를 알리는 신호탄인 매봉산 정상의 봉화를 신호로 일대의 갓모봉, 개목산 등에서도 봉화가 올랐다고 한다.

◇독립 의지를 불태운 ‘아우내 장터’

아우내 장터의 아우내 지명 유래비 ⓒ국토지리정보원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竝川)지역은 유관순 열사가 어린 시절 자랐던 곳으로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곳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이 지역은 지리적인 특성에서 지명이 유래된 곳으로, 인근의 백전천과 갈전천의 두 물길이 이곳에서 아우러지는 곳이라고 해서 “아우내”, “어우내”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현재의 지명으로 불리게 됐으며, 현재 아우내 장터에는 이러한 옛 지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우내 장터는 우리 국민들 사이에 특별한 역사적 사건과 결부돼 기억에 남는 지명이다. 바로 유관순 열사가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곳으로, 아우내 장터는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애국선열들의 정기가 서려있는 곳이다.

작은 강들이 만나 거대한 강줄기로 흘러가듯이, 뜻을 품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아우내 장터에 모였습니다. 1919년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아우내 장터에 모여 치열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유관순 열사는 열일곱의 어린 나이였지만 이곳의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수많은 열사들이 독립을 위한 열망으로 온 마음과 몸을 던지며 아우내 장터로 나섰고, 당시 만세 소리는 거대한 함성이 되고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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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희 기자 (aswith@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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