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⑤>살라미스 승전과 아테네 부활 예고한 올리브 소생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에렉테이온 신전 앞의 올리브 나무는 아테네인들이 신성시하는 사연 깊은 나무다. 아테네인의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전해지는 신화는 이렇다. 포세이돈과 아테나는 아테네인들의 경배를 받기 위해 서로 내기를 했다. 아테네인에게 선물 한 가지씩을 주고 이들에게서 선택받는 선물을 내놓은 사람이 아테네의 수호신이 되기로 약속했다.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은 바위산인 아크로폴리스에 물이 가장 소중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삼지창으로 바위를 찔러 바위 틈 사이로 샘물이 솟아오르게 했다. 아크로폴리스의 샘물은 바위산 위 성채 안에서의 인간의 생존력을 보장해 줄 것이다. 매력적인 선물이다. 아테나도 신력(神力)에 있어서 뒤지지 않았다. 아테나는 아테네인에게 영원한 먹을거리를 주려고 했다. 바로 올리브 나무가 싹트게 한 것이다.
암산 꼭대기에 샘물이 솟구치거나 나무가 자라나게 하는 것 자체가 신의 특별한 권능과 가호가 아니면 일어나기 어려운 기적이다. 더구나 아테네인에게 두 가지 신의 선물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유용한 선물일 터였다. 선택의 공은 아테네인에게 넘어갔다. 아테네인들은 무엇을 더 긴요하게 여겼을까?
그들은 올리브 나무를 선택했다. 한 여름에 아무리 뜨거운 햇볕이 작렬해도 그늘 밑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시원한 아테네의 특유의 지중해성 기후에서 이들에게 한 줌의 시원한 그늘과 올리브 열매가 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이렇게 해서 아테나는 아테네의 수호신이 되었다.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경쟁과 관련한 또 다른 전거(典據)도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이렇게 전한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는 대지에서 태어났다는 에렉테우스의 신전이 있고, 그 안에는 올리브 나무 한 그루와 짠물이 나는 샘이 하나 있다. 아테네인들에게 따르면,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이 땅의 영유권을 두고 다툴 때 증거로 내세운 것들이라고 한다.”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짠물의 샘과 올리브 나무를 자신들의 기적의 산물로 증거 삼아 아크로폴리스의 주인 자리를 다투었다는 얘기다.
아무튼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아테네를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한 것이었든, 아테네인들에게 선택받기 위해 경쟁한 것이었든 상관없다. 또 솟아난 샘물이 민물이었든, 짠물이었든 관계없다. 물론 현재 포세이돈이 샘솟게 했다는 샘물의 위치는 확인되지도 않는다.
포세이돈은 아테네인의 선택에 승복했다. 아테나가 만들어낸 올리브 나무의 효용을 순순히 인정한 셈이다. 이는 바위투성이의 척박한 그리스 토양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는 올리브 나무가 그리스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더 요긴했으리라는 점을 신과 인간들이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현재 아크로폴리스에 남아있는 올리브 나무는 애석하게도 아테나가 선물한 바로 그 나무는 아니다. 아테네의 올리브 나무는 페르시아와의 3차 전쟁에서 아크로폴리스를 점령당하면서 페르시아 군에 의해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당시 페르시아군은 아크로폴리스에 있던 모든 신전들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기원전 480년의 일이다. 당시 아테네 군은 아크로폴리스와 아테네 방어를 포기하고 퇴각하면서 시민들을 살라미스로 소개(疏開)시키는 포고를 내렸다. 이 명령에 불복하고 아크로폴리스에 남아있던 수백 명의 시민들이 수만 명의 페르시아 군에 맞서 며칠간 저항하다 함락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꼭 10년 전인 기원전 490년 아버지 다리우스 대왕의 대군이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한 설욕을 톡톡히 갚은 셈이다. 크세르크세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직접 이끈 최정예군 300명을 전멸시킨 여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그리스 본토를 유린했다. 아테네를 주도(主都)로 한 아티카 지방은 완전히 유린당했다. 특히 아테네의 천혜의 요충지이자 신성한 성지인 아크로폴리스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사실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대군과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전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육지에서의 전투는 전혀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하여 아테네 시가지, 아티카 지역의 주요 소도시와 시골 촌락에 거주하는 모든 아테네인들을 살라미스 섬으로 피난시킨 이유다. 결국 본토를 비운 채로 내주는 청야(淸野) 작전을 쓴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패를 육전이 아닌 해전으로 반전을 노렸다.
아크로폴리스에 있던 파르테논 신전과 에렉테이온 신전 등 모든 신전이 파괴되고 수장되어 있던 보물과 신상(神像)들은 페르시아 군에 의해 모조리 약탈당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생명이 그걸로 끝나진 않았다. 회생의 징조가 보였다. 놀랍게도 불에 탄 아테나의 올리브 나무에서 새 생명이 돋았던 것이다. ‘아테나의 올리브 2세’가 움튼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그 상황을 이렇게 담담하게 전한다.
“화재 다음날 왕의 지시를 받고 제물을 바치러 신전에 올라갔던 아테네인들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1페퀴스(대략 45cm)쯤 돋아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크세르크세스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올리브 나무의 새싹이 별게 아닌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라의 심장부를 빼앗긴 아테네인들에겐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희망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새로운 올리브 나무의 싹을 발견한 아테네인들의 가슴엔 페르시아에 굴종하는 노예가 아닌 아테네의 수복과 '자유'를 향한 새로운 희망이 차오르지 않았을까?
아크로폴리스와 아티카 전역을 페르시아 군에 점령당함으로써 아테네는 발 딛고 서있을 나라의 땅을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살라미스 섬으로 피난한 아테네인들과 해상으로 물러난 아테네 함대가 존재하는 한 아테네는 멸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테네인들의 운명에 따라 그리스 전체가 존망이 경각에 걸렸던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크로폴리스를 내주고 육상에서 빠져나온 아테네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끈 아테네 해군을 주축으로 한 그리스 연합함대는 두 배가 넘는 페르시아 대 함대를 격파했다. ‘아테나의 올리브 2세’의 새싹이 바로 살라미스 해전의 승전과 아테네의 부활을 전조했던 게 아니었을까? 오늘날 에렉테이온 신전 앞의 올리브 나무는 3천년을 이어온 그리스 문명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지금도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는 남서쪽의 언덕 좌우로 올리브 나무숲이 우거져있다. 관광객들이 뜨거운 햇볕을 피해 땀을 식히기에 좋은 곳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리스 전역에 가장 많이 분포한 수종은 단연 올리브 나무다. 토양이 거의 다 유실된 뼈만 남은 바위산에서 독야청청 끈질긴 생명력을 증명해 주는 것도 올리브 나무다. 거친 암산에 뿌리를 내린 야생 올리브 나무들을 보면 마치 광야의 성자(聖子)와도 같은 느낌이 든다.
지혜의 신이자,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의 상징은 올빼미와 올리브 나무다. 올리브 나무는 그리스인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올리브 나무는 아테나 여신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준 매우 특별한 선물이다. 아테나의 상징인 올빼미와 올리브 가지는 BC 6세기 후반에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본토에 최초로 만들어지는 주화에까지 등장한다. 아테나의 상징을 손 안에 갖게 된 것이다.
당시 4마르크의 은화로 만들어진 주화의 문양은 현대 유로화에 그대로 담겨 살아났다. 1유로 표식을 빼고는 2500년 전의 주화의 문양을 그대로 차용했다. EU도 아테나가 유럽 문명에서 차지하는 상징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유럽의 공동화폐로 담아 이를 계승해주고 있는 셈이다.
올리브 나무는 아테나 여신만큼이나 그리스인들의 사랑을 받는 실용적인 자산이다. 그리스 음식 문화는 곧 올리브 문화라고 할 만큼 올리브 나무 열매는 그리스인들을 먹여 살리는 전천후 식품이자 약용의 소재이기도 하다.
야생 올리브로 만든 올리브관은 근대 올림픽 경기의 기원이 된 올림피아 제전의 우승자에게 씌우던 영광의 승리관이었다. 올리브관을 쓴 우승자는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도시와 가문에 큰 영광을 안겨주었다. 경기 종료에 이어 대관식이 끝난 후에는 심판관과 관람객들로부터 축하 향연을 받았다. 귀국 후 전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것은 물론, 왕이나 도시 행정관 또는 유력자들이 베푸는 축하 퍼레이드와 향연을 대접받았다. 올리브 나무는 아테네의 신성한 나무를 넘어 그리스인 모두의 성수(聖樹)이자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대개 고대 그리스의 체육 경기의 모든 승자에게 월계관이 수여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느 한 신문 기자가 그리스 문화 탐사기를 쓰면서 올림피아의 경기 승자에게 ‘올리브 월계관’이 수여되었다고 쓴 것을 보고 실소한 적이 있다. 월계관이 체육경기자에게 주어지는 승리관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올리브관과 월계관은 엄연히 다르다. 각각이 채택된 사연도 다르고 각각의 상징과 정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리스에는 범그리스 제전이 4개나 있었다. 기원전 776년에 최초로 열린 올림피아 제전에서는 올리브관이, 코린토스에서 열린 이스트미아 제전의 승리자에게는 무화과 화관이 수여되었다. 아폴론을 경배하기 위해 델피에서 열리던 피티아 제전의 승자에겐 월계수관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 지방에서 개최되던 네메아 제전에서는 올림피아 제전과 동일하게 올리브관을 수여했다.
이처럼 승리관이 다른 이유는 제전을 주최하는 도시마다 가장 신성시 하는 나무가 달랐기 때문이다. 또 채택하게 되는 사연도 조금씩 다르다. 월계수관이 채택된 사연은 델피 기행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그리스인들이 잎으로 장식된 엽관(葉冠)을 경기의 승자에게 준 것은 현대 올림픽 승리자에게 값진 메달을 수여하는 관습에 비추어보면 초라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의 사유 방식은 달랐다. 그들은 식물의 생육의 상징을 머리에 관으로 씀으로써 인간의 성숙과 발전의 동력으로 전화(轉化)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흔한 나무 잎으로 장식한 승리관에 최고의 영예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리스인의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존경과 수용이 아름답지 않은가? 자연을 경시하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나뭇가지 관은 하찮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승리관의 현실적 가치보다 보이지 않는 무한한 상징적 가치를 읽을 줄 알았고 이를 소중히 생각했던 것이다.
올리브 나무는 그리스의 국수(國樹)이다. 올리브 꽃은 항제비꽃, 아카더스와 함께 그리스의 국화(國花) 중의 하나다. 올리브의 기름은 다목적으로 쓰였다. 식용, 제례용, 의학용, 미용, 스포츠용으로 그 쓰임새가 매우 넓다. 올림피아 제전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온 몸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그 위에 모래를 뿌려 피부를 먼지로부터 보호하고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했다.
그리스의 각종 제전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는 올리브유를 가득 담은 암포라가 부상으로 수여되었다. 올리브유가 체육선수에겐 소중한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승자에게 수여되는 암포라는 일상적으로 올리브유와 곡식을 담는 그릇으로 널리 쓰인 보통의 암포라와 달랐다. 앞면에 아테네 여신의 그림이 새겨지고 뒷면에 해당 경기종목의 그림이 그려진 아주 특별하게 제작된 암포라였다고 한다. 대대로 가보로 삼을 만한 최상의 우승 트로피였던 셈이다.
아테나의 선물 올리브 나무는 상징성이나 실용적인 면에서 모두 중요하게 여겨져 널리 식재되고 활용되었다. 특히 올리브 나무의 활용도가 점점 높아져 그리스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자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Solon)는 올리브 식재를 권장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솔론은 자유, 희망, 순결, 질서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가 많이 심어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국민정신의 계몽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이런 입법화를 계기로 올리브 나무가 시민들의 주택 내의 마당에도 많이 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한국인이 소나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인들의 올리브 나무 사랑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올리브 나무가 특별하게 쓰인 흥미로운 예도 있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상징적 무기인 몽둥이는 바로 올리브 나무로 만들어졌다. 헤라클레스가 치렀던 12고역 중 첫 번째가 미케네 지방에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을 마구 죽이던 네메아의 사자를 처치하는 일이었다. 네메아 사자의 가죽은 창이나 화살로 뚫리지 않았고, 칼로도 벨 수 없었다고 한다. 헤라클레스는 야생 올리브 나무를 뿌리째 뽑아 몽둥이를 만들어 사자의 머리를 때리고, 육탄 공격을 감행하여 목을 졸라 죽인다.
헤라클레스가 그리스 세계에 명성을 날리며 영웅으로 탄생하는 첫 번째 쾌거의 비밀 병기는 바로 올리브 몽둥이였던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사자의 가죽을 벗겨 자신의 투구이자 갑옷으로 삼았다. 그래서 헤라클레스의 조각상에는 늘 사자머리 가죽과 올리브 몽둥이가 함께 한다. 올리브 나무는 악을 물리치는 신의 병기로 헤라클레스의 상징적 지물(持物)이 된 것이다.
유럽 문명의 원천은 그리스 문명이다. 우리는 유럽의 도시 어디를 가더라도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독일의 아름다운 고성(古城) 하이델부르크에서 헤라클레스를 만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뢰머 광장에서는 아테나를 마주한다. 파리 샹들리제 거리의 수많은 인파는 개선문에 아로새겨진 아테나의 평화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 무심히 지나쳐 버리기 때문에 유럽 문명에 스민 그리스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뿐이다.
파리의 개선문에 새겨진 4개의 부조 가운데 한 작품인 ‘1815 평화’를 자세히 살펴보시라. 부조의 아름다움 못지않게 우리에게 호소하는 메시지는 더욱 강렬하다. 개선문 앞에서 사진 찍기에 열중인 관광객은 많지만, 개선문에 새겨진 각각의 부조를 유심히 관찰하고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추측하거나 되새겨 보는 이는 드물다. 여기에도 그리스 신화와 상징이 생생히 살아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유럽 여행은 고대 그리스 문명 기행의 연장이기도 하다.
병사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전쟁의 종식을 알린다. 그의 얼굴 표정은 적을 살상해야 하는 살기와 투지 대신 평온함을 띠고 있다. 전쟁의 묘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포효하는 말의 모습은 사라졌다. 장인들은 농사에 쓰일 보습을 다시 챙기고, 농부는 의욕에 찬 모습으로 밭을 갈 황소의 고삐를 다잡고 있다. 이들의 노고로 밀들은 싱싱하게 자라난다. 공포에서 벗어난 어머니는 이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 귀여운 자식들을 어를 수 있게 되었다. 이 부조의 백미는 인간과 자연, 동물들이 각자의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북돋우며 평화로운 삶을 복원시키는 아테나 여신의 은총의 주재다. 전쟁이 여신이기도 한 아테나는 고르곤이 새겨진 아이기스를 걸치고 있지만, 왼손에 거머쥐었던 방패는 어딘가에 내려놓았다. 전투를 위해 오른손에 들리던 창은 이제 왼손으로 옮겨져 있다. 아테나의 배경이 되고 있는 올리브 나무는 평화에 대한 의지와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프랑스인 역시 평화의 보증자이자 담지자로 이런 아테나를 영원히 곁에 두고 있는 싶은 것이다.
올리브 나무가 만들어내는 평화의 상징은 인류의 공영에도 큰 기여를 해준다. 비둘기가 노아의 방주로 물고 온 올리브 잎은 희망과 소생, 평화를 의미했다. 이제 현대사회에서도 비둘기와 올리브 가지는 평화를 상징하게 되었다. 국제연합 기의 올리브 가지 장식은 세계 평화에 대한 인류의 희구를 담고 있다. 아테나가 아테네에 최초로 선사한 올리브 나무는 이제 온 세상 사람들의 공동의 정신적 자산으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종족 분쟁과 국가 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전쟁의 위기도 산재해 있다. 한반도 역시 북한 핵의 공포의 그림자가 덮여있다.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아테나가 선사한 풍요와 평화의 올리브 나무가 심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 신화와 상징은 수천 년을 넘어 우리에게도 여전히 새로운 자극과 각성을 준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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