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들과 말을 나누던 중 ‘된장녀’ 이야기가 입에 올랐다. 최근 이야기이므로 모두 다 알리는 없다. 모르는 학생에게 설명해주게 되었다. “1500원짜리 밥을 먹고는 5천 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여성. 명품을 선호하고..” 이렇게 말하는 중간에 그 학생이 눈을 아주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말한다. “그게 뭐가 잘못 되었는데요?” “어...?‘”, “혹시 그대가 된장녀...?” 좌중은 웃음...물론 결론은 잘못이 아니다에 모아졌다.
처음에 벌어진 ‘된장녀’에 대한 논란은 차츰 생명력을 가지며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계층 상승과 선망론에 명품과 럭셔리즘 논쟁, 그리고 남녀 성대결로 격화되었다. 여기에 된장녀에 대한 비판은 극단적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라고까지 확대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치 중에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버리고 유리한 것은 옹호하면서 극단적으로 남자를 혐오하면서 남자들을 뜯어 먹는 여성이라고까지 한다. 물론 갖은 이야기를 부풀리고 있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우선 커피에 대한 이야기로 좁혀보면, 된장녀 논쟁은 문화적 충돌이다. 다방 혹은 자판기 커피문화와 테이크 아웃 혹은 스타벅스 커피문화가 맞부딪힌 것이다.
일단 된장녀라는 비난에는 편견이 농축되어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스타벅스 논쟁을 보면서 혀를 찰 것이다.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스타벅스의 감성 경영은 이미 교본이 된지 오래다. 더 이상 사람들은 내용물, 혹은 사용가치에 따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에 따라 소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중진 자본주의 국가 혹은 중산층의 소비 성향을 보이는 사회에서는 더욱 가능하다는 얘기다. 아니 경제적 소비는 모방과 선망, 차별화 등의 동기로 작동한다. 이들에게 1500백 원 짜리 밥은 그만큼 가치가 적게 들어가고 오히려 커피에 가치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꺼이 비싸게 지불한다.
사실 비싼 커피 소비를 비판하는 시각에는 한 가지 편견이 들어가 있다. 흔히 커피하면 싸구려라는 인식-"가치없음". 있어도 그만, 없으면 안 마셔도 된다는 논리가 있다. 밥은 소중하고 커피는 가치가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물론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미국, 영국 등에서 원두커피 1kg 당 소비자 가격은 평균 26.4달러,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14센트(130원 수준)정도인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가치 있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남성들은 왜 물에 불과한 위스키에 그렇게도 사족을 못 쓰는 것일까? 라면을 먹으면서도 위스키를 카드를 긁어가면서 먹는 남성들 역시 된장남이다. 물론 우리의 우수한 식품인 된장을 이런데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미 규정된 용어이니 반복할 수밖에 없다. 여성들의 명품 선망을 이야기하지만 빚져가며 고급 승용차를 모는 남성들은 오죽이나 많은가. 남성들 중에도 폼생폼사는 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여성의 허영심을 이야기 하지만 남성의 객기와 명예, 겉멋은 얼마나 심한가. 부자 남자를 선망하는 여성도 많지만, 부자 여성을 선망하는 남자도 많다. 뉴요커라고 착각하는 것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다. 브랜드를 통해 지위를 혹은 권력 삼아 자랑하려는 남성들도 만만치 않다. 미국 학교 이름과 마크가 달린 옷은 어떤가. 양키즈 옷을 사 입고 다니면 자신이 야구의 달인인가.
애초에 성대결은 소모전의 돌입을 의미했다. 더구나 허영을 소비하건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발동이건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하지 않나. 가치는 각자에게 다른 데 도덕적 윤리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부를 유출시킨다는 대의적 비난까지 덧붙인다. 그런데 왜 비난하는 남성들은 된장녀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정말 애국적 견지에서 우국충정으로 비판하는 것일까?
다음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후배 된장녀가 커피를 사달라고 했을 때 선배는 아니 사줄 수 없다. 선배라는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아니 포용력 있고 능력있는 선배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데 비싼 커피라...자신은 1500만 원 짜리 밥을 먹고, 100원짜리 자판기를 마시는데 말이다.
물론 이 남자에게 커피는 그렇게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발끈할 만 하다. 한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면 아, 그런데 비극성은 이 후배가 예쁠수록 남자는 비극성이 커진다. 그녀에게 관심이 있을수록 욕이 나올터다. 계속 품위를 유지하자는데, 감당할 경제력은 없으니 말이다. 고급 패밀리 레스토랑을 선호하는 여성들을 감당하는데 겁을 먹는다. 반복하면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렇게 신경을 쓸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결국 자기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된장녀 이면의 심리에는 남성들의 이중 심리가 농축되어 있다. 소유할 수 없는 여성에 대한 자학적 비판이 된장녀 논란의 출발이었다. 정말 비싼 명품에 고급차를 사주지 못하는 자신이 비참하다.
그것을 가지면, 사주면 멋지고 예쁜 된장녀들이 자신을 따를 텐데하는 심리는 없는 것일까-정말 경제력이 있으면 사랑을 얻을 수 있을 지는 물음표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 된장녀를 뒷받침할 수 없는 자신을 자학하는가 하면 여성을 저항의 관점에서 공격하는 것이 고추장남이라는 이의 특성일 것이다.
이때 부조화의 모면 방법은 이런 거다. 일부러 자신의 빈한함을 티내면서 상대방을 허위의식의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 또한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정작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된장녀라는 여성이 아닐 것이다.
도대체 그런 여성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커피를 들고 다니면서 마시는 척하는 이들이라면 전체 여성 중 몇 명일까? 일반화시킬 계제가 될 지 의문인 것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정무역을 하지 않는 혹은 그것을 또 다른 상품화 전략으로 어설프게 사용한 스타벅스에 있다.
<시사 매거진 2580>의 보도대로 같은 카페라떼가 한국에서는 일본 보다 천 원 정도 비싸고 미국보다는 천원 넘게 비싸다고 하지 않는가.환율과 임대료의 차이라고는 하지만 산정된 환율은 1달러 당 1,250원을 훨씬 못 미치고, 임대료는 일본보다 저렴하다.이 때 비싼 가격이라면 사지 않으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간단하지 않다. 가격이 비싼 것은 소비자가 올린 것이 아니다. 이럴 때 업계 담합으로 애초에 설정된 것이라면 이것이 더 문제가 아닌가.
어차피 된장녀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다. 거대 자본에게 싼 가격에 커피를 넘기는 농민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의 허허로운 마음, 감성 결핍을 커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그것도 비싸게 돈을 주면서 말이다. 우리 사회가 그것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여성이 남성을 착취한다고 하지만 빈대 붙기도 한 두 번이지 그렇게 어떻게 살겠는가. 남성은 여성을 착취하지 않는가. 이때 남성도 희생자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취업은 어렵지, 아직도 남성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은 몸을 무겁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담감과 현실적 불만을 된장녀라는 허구의 적에게 성토하고 있으니 연민의 대상이 된다. 은둔형 외톨이인 히키코모리의 대부분이 남성이며, 그 원인은 사회적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가. 고추장남도 이러한 처지다.
요컨대, 된장녀는 상상의, 허구의 존재이다. 지금 허구를 두고 논쟁하고 있다. 값싼 밥 먹고 값싼 논쟁이 아니라 값싼 밥 먹고 비싼 일일을 해야 할 터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타벅스 커피를 먹으면 고칼로리 때문에 심장병과 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현대식 라이프 스타일의 총아라고 감성 비즈니스의 실체가 그것이다. 건강을 해치면서 그것으로 노동 가치를 착취하는 것 아닌가. 인간의 나약함을 활용하는 상품 구조의 문제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생산과 제조 유통 사이의 불합리한 구조다. 논쟁한다고 해도 화살의 목표는 된장녀-된장남이 아닐 것이다. 약점을 통해 이들의 마음을 강박하면서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다.
이렇게 되면 원론적이고 근본적이라고 해도 애매한 이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쓰는 것보다 낫다. 여기에 사회적 양극화와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꿈을 잃어버린 세대의 초상이 된장녀 논쟁에 있음을 놓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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