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바다를 끼고 있어 늘 왜적의 노략질이 끊어지질 않았다.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부산인근에는 왜성을 포함한 크고 작은 성터들이 34개소가 있다. 그 중심에 동래읍성이 있다.
조선시대 때 동래읍성은 도호부로서 부산지역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읍성에 올라가 왜군들과 싸움을 독려하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영혼이 깃든 역사의 현장으로 가본다.
읍성은 충렬사 뒤산 동장대에서 마안산 정상 북장대를 지난다. 성줄기는 서장대가 있는 동래향교 뒷산까지 야트막한 구릉을 타고 넘으며 2km 남짓 이어졌고, 동래시가지의 일부와 산을 감싸않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고유의 읍성형태를 갖췄다.
복원한 북문 안쪽
육지 최남단에 자리한 동래읍성의 초축은 고려 말이다. 이때 쌓은 성의 둘레는 900m로 지금의 절반이다. 조선 세종 29년(1447)에 보수했고, 선조 25년(1592)임진왜란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그 후 140년 동안 훼손방치 되다가 영조 7년(1731)에 나라의 관문인 동래읍성의 중요성을 감안해 지금의 규모로 확장했다.
동서남북에 4개의 성문과 문루를 세웠고, 정문인 남문은 날개처럼 양쪽에 익성으로 쌓아 앞에는 세병문, 뒤는 주조문의 이중구조를 세웠다. 서문과 북문에는 옹성을 축조하였고 장대와 망루 등 15개의 보루도 구축했다.
일제강점기에 도시개발로 동래읍성도 비켜나질 못했다. 서문과 남문사이의 성벽이 철거되고, 남문과 동문사이 성벽도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안산 인근 일부 성벽만 남기고 퇴락됐다.
동장대 주변 성벽
박정희 대통령시절인 197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전국의 국방유적 복원사업으로 동래읍성도 정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멸실된 유적의 복원은 막대한 재정과 인력이 투입되는 과정이 있어 아직도 미 복원 상태로 남아있다.
최근까지 동래읍성의 복원은 동장대, 북장대와 북문, 서장대 일대 성벽과 치성 등 2km 중 절반에 그치고 있다. 동래구 관계자는 "정확한 고증을 거쳐 선열들의 충절이 스며있는 역사적인 유적지로 2020년까지 복원할 것이다"라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국가사적 지정을 위해 적극 노력할 계획도 세웠다. 임진왜란 초기, 수일간 동래읍성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일본군 고니시가 이끄는 1만8700명의 왜군을 실은 700여척의 함정이 물밀듯이 부산 앞바다에 몰아 닥쳤다.
정상의 북장대
갑작스런 왜적의 등장에 경상도 해상관문인 부산진성은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당시 성안에는 수군첨절제사 정발이 이끄는 천여 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조총을 앞세운 왜군은 부산진성으로 대규모 공격을 해 왔다.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됐으나 열세에 몰린 조선군은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초전에 부산진성을 점령한 왜군은 여세를 몰아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락시켰다.
4월15일 아침, 경상좌병사 이각은 울산에서 동래성으로 출정하고, 양산과 울산의 군수도 동래성에서 합류해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방어대책을 논이 했다. 성안에 집결한 각 군사들도 군민들과 함께 항전에 대비했다. 부사 송상현은 읍성남문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수비에 만전을 기했다.
왜군이 공격해 온다는 보고를 받은 이각은 양산군수 조영규에게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나가 막으라고 지시하였다. 조영규는 남쪽 4km 까지 진격했다가 돌아와서 “적의 군사가 너무 많아 도저히 싸울 수 가 없다.” 고 하자 겁에 질린 이각은 부사 송상현에게 군사를 모집한다는 핑계로 성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북문 밖 옹성
송상현은 한탄을 금치 못했다. “나라에서 내게 이 성을 맡겼으니, 내가 살고 성이 함락될 수는 없다. 나는 성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다.” 라고 결의를 굳게 다졌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 목숨 바쳐 성을 지킬 것을 다짐하고, 사람들을 성안으로 불러들였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는 남문에 올라가서 적을 기다렸다.
정예대군과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왜군 앞에 조선군은 소수의 병력과 조잡하기 짝이 없는 무기뿐이었다. 오직 성벽에 의지해 죽음으로서 항전할 수 밖에 없었다.왜군의 선봉군이 동래읍성을 포위했다. 왜군은 “싸우든지 아니면 길을 열어라” 목판에 글을 써서 남문 앞에 세웠다 이에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어도 길은 열지 못한다.”라고 써서 적에게 던졌다.
복원한 동장대
송상현은 성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각오했다. 적은 조선군이 항복하지 않자 세 갈래로 성을 공격했다. 성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쪽 벽이 무너지면서 적은 파죽지세로 쳐들어왔다. 군과 백성들은 혼연일체가 돼 항전했으나 왜군과의 적수는 되질 못했다. 성안은 불타고 곧 아비규환의 살육장이 되고 말았다.
송상현은 최후를 맞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조복으로 갈아입고 전패(殿牌)를 모신 객사를 향해 네 번 절했다. 또한 그는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적에게 포위됐는데 다른 진영(鎭營)에서는 도와줄 기척도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무겁고 부모와 자식의 정은 가볍습니다” 라는 비장한 시(詩)를 써서 아버지에게 보내고 42세 나이에 의연한 자세로 죽음을 맞았다.
당시의 역사적인 장면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부산진순절도(보물 391호)와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육군박물관 소장). 이 그림 속에는 아비규환의 참상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복원한 치성
동래읍성 탐방은 가파르지 않다. 고향의 둔덕 같은 곳이다. 어디서 출발해도 좋다. 가장 높은 곳에 장수들의 지휘소인 북장대가 있다. 그곳에 서면 탁트인 조망권이 압도적이다. 동래지역은 물론 광안대교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동래읍성은 일부성벽만 옛것이고 대부분의 시설물은 최근 복원해 옛 맛이 덜하다. 하지만 418년 전 조상들의 애국 혼이 서려있어, 역사와 도심이 주는 분위기는 이색적이다. 한 여름 밤, 이곳으로 역사산책은 멋진 추억이 된다.[데일리안 = 최진연 기자]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