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승려 이동인은 누가 죽였나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09.10.22 08:39  수정

<신봉승 칼럼> ´사토 페이퍼´에 기록된 조선근대화의 선구자

갑신정변의 배후 추정…고종 배알뒤 실종, 역사에서도 가려져

1980년, 영국외무성에서는 비공개시효가 만료된 외교문서 ´사토페이퍼'(Satow Paper)를 공개하였다. 이 문건은 조선말기의 외교사를 다시 써야할 만큼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건을 적은 어니스트 사토(Ernest Satow)는 조선의 젊은 승려 이동인(李東仁)이 교토에 있는 히가시 홍간지(東本願寺)에서 득도하여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을 무렵, 주일 영국공사관의 2등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37세의 외교관이다.

그는 일본 근무를 마치면 조선으로 건너갈 생각이었던 모양으로 자신에게 조선어를 가르쳐 줄 개인교사를 초빙하고자 했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이동인에게는 낭보가 아닐 수 없다. 이동인이 지체 없이 일본주재 영국공사관으로 달려가 2등 서기관인 어니스트 사토를 만난 날이 1880년 5월 12일이다.

오늘 아침 아사노(朝野)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 승려가 찾아왔다. 그는 아사노라는 이름이 조선야만(朝鮮野蠻 : Korean Savage)이라는 뜻이라고 재치 있게, 설명하면서 세계를 돌아보고 자기 나라 사람들을 개화시키기 위해서 비밀리에 일본에 왔노라고 말했다. 그의 일본어는 서투른 편이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외국의 문물이 엄청나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돌아가서 자신의 동포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유럽의 건물이나 그 밖에 흥미 있는 것들을 찍은 사진들을 구입하고자 했다.

또한 영국을 방문하기를 열망하였다. 그는 자기가 서울 토박이라고 말하면서, 서울에서는 ‘쯔(tz)’라고 발음하지 않고 ‘츠(ch)‘라고 발음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는 일요일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1880년 5월이면 한미수교조약이 체결되기 2년 전의 일인데, 그러한 시기에 조선의 개화승과 영국의 직업외교관이 마주 앉아 조선국의 미래를 화두로 삼았다는 사실은 주목하고도 남을 일이다.

두 사람은 초대면인데도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했음이 분명하다. 이동인이 영국을 방문하기를 열망하였다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사토 페이퍼´는 더욱 흥미롭게 이어진다.

1880년 5월 15일.
나의 조선인 친구가 다시 왔다. 그는 조선이 수년 내에 외국과 수교를 맺게 될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조선정부를 전복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고 했다.(중략)

그는 3시간 가량 있다가 갔다. 나는 오는 20일, 시계를 사러 요코하마 시장에 데리고 가기로 약속했다. 그는 금, 석탄, 철 및 연해의 고래 등 풍부한 조선의 자원을 개발하는 일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시고 있었다.

그는 좋은 인삼과 나뿐 인삼의 견본을 나에게 주었는데, 유럽의 의사들이 인삼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인삼이 조선의 중요 수출품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동인이 ´조선정부를 전복할 필요´가 있으며, 이에 동조하는 젊은이들이 있음을 역설한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로부터 4년 뒤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고,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유길준, 서재필 등의 주역들이 모두 그의 문도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동인의 조선근대화에 있어 선각자적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김홍집이 귀국하여 이동인의 존재를 고종에게 알리자 놀란 고종은 이동인을 거처인 창덕궁으로 불러 금봉(金棒) 세 개를 내리면서 다시 일본국에 다녀올 것을 명한다. 물론 이때는 고종의 신임장이 주어진다.

이 사실이 조선의 수구세력에게 알려진다면 큰 문제가 야기될 것이 분명하였기에 고종은 “부산에서 떠나면 남의 눈에 뜨일 염려가 있으니 원산에서 떠나라”고 몸소 당부했을 정도다. ´사토 페이퍼´ 는 이 사실까지도 입증하고 있다.

아사노가 어젯밤 갑자기 나타났다. 이제 막 도착했다면서 큰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국왕이 개명했다는 희소식과 국왕이 내준 여권(신임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이 러시아로부터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국왕이 깨닫고 있으며, 몇 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개화당이 현 배외내각(排外內閣)을 대치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정으로 미루어 본다면 당시 개화와 수구의 양 갈래로 갈라졌던 조선의 지식인 중에서 조선 근대화의 필요성과 근대화의 방향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인물이 이동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당시 조선은 근대적인 조직으로 정부를 개편하는 와중이었다. 고종은 이동인에게 “환로(宦路:공직)에 나서야 하지를 않겠느냐”고 출사를 권고한다.

이 같은 이동인의 급격한 부상은 수구세력이나 젊은 개화세력의 양쪽 모두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뿐만이 아니다.

청나라에서도 국제정세에 정통한 조선인의 출현은…, 특히 북양대신 이홍장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일 것이었고, 일본에서도 처음과는 달리 자신들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이동인의 존재를 달갑게 여길 까닭이 없다.

이동인은 고종을 배알하고 나온 다음 곧 행방불명이 된다. 누구의 소행인지도, 언제 있었던 일인지도 밝혀지지 않은 채 1세기의 세월이 흘러갔다면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지만, 이 엄연한 사실이 우리 근대사의 전면으로 부상하지 못하는 까닭은 더욱 참담하기 그지없다.

역사학자들이 편협한 탓인가, 아니면 공부가 모자란 탓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당연히 역사인식의 부족으로 지적되어야 마땅하다.

글/신봉승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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