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최정원·장승조·정운선·문유강 등 출연
예술의전당 토월정통연극 세 번째 작품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은 가난한 집안이 다리가 불편한 딸의 혼처를 찾으려다 실패하는 이야기로 요약된다. 1944년 시카고 초연 이듬해 브로드웨이로 옮겨 뉴욕 드라마 비평가 협회 최우수 미국 연극상 등을 받으며 작가를 스타 극작가로 만든 작품이지만, 줄거리에서 사건이라 부를 만한 것은 저녁 식사 한 번이 전부다. 그런데도 80년 넘게 세계 곳곳의 무대에 오르는 것은 저마다 현실을 견디려고 붙든 작은 환상이 그 사람을 지켜 주는 동시에 어떻게 가두는지를 한 가족 안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술의전당이 ‘오셀로’(2023), ‘햄릿’(2024)에 이어 세 번째 토월정통연극으로 올린 신유청 연출의 ‘유리동물원’은 그 질문을 오늘의 객석까지 끌고 온다.
연극 '유리동물원' 무대 ⓒ예술의전당
배경은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낡은 아파트다. 남편이 떠난 뒤 어머니 아만다는 젊은 시절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였던 기억에 기대어 살고, 딸 로라는 바깥 대신 집에 머물며 유리로 만든 작은 동물들을 돌본다. 구두 창고에서 일하며 생계를 떠맡은 아들 톰은 시인을 꿈꾸며 밤마다 영화를 보러 집을 나선다. 아만다의 재촉에 톰이 직장 동료 짐을 저녁 식사에 데려오면서 집 안에는 잠시 기대가 생기지만, 짐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그 기대는 그날 밤 끝난다. 작품은 집을 떠난 톰이 그 시절을 돌아보는 형식으로 짜여 있고, 작가는 이를 ‘기억극’이라 불렀다.
신 연출은 개막 전 기자간담회에서 “등장인물들의 의상과 소품에 부여된 색채 상징을 분석하며 무대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자 ‘기억’으로 남도록 연출하고 있다”고 밝혔고, 무대를 소실점 중심으로 설계했다고도 설명했다. 실제 무대는 그 의도를 비교적 정확하게 구현한다. 집은 실제보다 기울고 뒤틀린 모습으로 서 있고 공간 전체가 무대 안쪽의 한 점으로 모이도록 짜여 있어서, 관객은 한 가족의 거실을 보는 동시에 톰의 회상 속을 들여다보게 된다.
연극 '유리동물원' 공연 사진 ⓒ예술의전당
가장 효과적인 장치는 주방과 거실을 가르는 하얀 커튼이다. 커튼이 닫힌 채 한쪽에서 대화가 이어지면 반대편에 남은 인물은 그 대화에서 밀려나고, 좁은 집에서 서로를 가장 가까이 두고도 닿지 못하는 가족의 상태가 별다른 설명 없이 전달된다. 사실적인 세트로 가난을 재현하기보다 빛과 어둠의 대비로 장면을 나눈 선택 역시, 기억은 사실보다 감정으로 남는다는 원작의 태도와 맞물린다.
최정원의 아만다는 이 무대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다. 블루 마운틴 시절 찾아온 구혼자들을 늘어놓을 때의 들뜬 목소리와 로라가 학원을 그만둔 사실을 알게 된 뒤의 무너지는 표정 사이의 간격이 커서, 아만다를 극성스러운 어머니로만 보기 어렵게 만든다. 뮤지컬 무대에서 다진 에너지가 인물의 과잉을 살리는 쪽으로 쓰인 덕분이다. 장승조의 톰은 해설자로 객석에 말을 건넬 때의 건조한 거리감과 어머니와 부딪칠 때의 격한 감정이 대비를 이루고, 마지막 독백에 이르면 떠난 사람이 오히려 가장 오래 그 집에 붙잡혀 있다는 역설이 분명해진다.
2014·2015년 국립극단 공연 이후 11년 만에 다시 로라를 맡은 정운선은 짐과 왈츠를 추며 잠시 풀렸던 몸이 짐의 고백 뒤 다시 움츠러드는 과정을 크지 않은 동작 안에서 보여주는데, 그 절제가 오히려 상처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문유강의 짐은 악역도 구원자도 아닌 보통 사람이고, 그의 호의가 진심이기 때문에 로라에게 더 잔인한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과장 없이 그려 낸다.
연극 '유리동물원' 공연 사진 ⓒ예술의전당
원작대로 로라가 촛불을 불어 끄며 막이 내리지만, 이번 무대에서 그 어둠은 체념보다 위로에 가깝게 읽힌다. 전환점은 짐이 떠난 뒤 아만다가 로라 곁에서 딸을 달래는 짧은 장면이다. 내내 딸에게 자신의 지난 시절을 덧씌우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딸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순간이고, 신 연출이 간담회에서 관계에 생긴 ‘작은 틈’이라고 표현한 대목이기도 하다. 공연은 비극의 결말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그 끝에 남는 것이 절망만은 아니라는 쪽으로 무게를 옮겨 놓는다.
1930년대 세인트루이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것은 인물들이 붙든 환상의 모양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통하지 않는 성공 공식을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부모, 생계와 꿈 사이에서 어느 쪽도 온전히 택하지 못하는 청년, 상처받지 않으려고 바깥과의 접촉을 끊은 채 방 안에 머무는 사람, 자기계발로 불안을 덮으려는 직장인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작품은 이들 가운데 누구도 비난하지 않고, 각자의 유리동물원이 그 사람을 버티게 했지만 동시에 가족 사이를 막아 왔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이 연극이 관객에게 묻는 것은 환상을 버릴 수 있느냐보다, 그 환상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으냐는 쪽에 가깝다. 공연은 11월 22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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