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권 없는 협회, 무엇으로 현장을 바꾸나 [뮤지컬 협회 분화, 무엇을 바꾸나③]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11.08 06:29  수정 2026.11.08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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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협회·창작자협회 모두 사단법인…노조와 달리 단체교섭권 없어

제작사협회 “직군별 단체 출범은 자연스러운 흐름…대등한 연대 필요”

스태프·오케스트라는 여전히 대표 단체 없어

한국뮤지컬배우협회(이하 배우협회)와 한국뮤지컬창작자협회(가칭·이하 창작자협회)는 모두 노동조합이 아닌 사단법인을 택했다. 회원 권익을 대변하고 법률 지원과 교육을 할 수는 있지만, 노조처럼 제작사와 단체교섭을 하고 그 결과를 협약으로 강제할 법적 권한은 없다. 협회가 만들 계약 기준이 현장에서 실제로 쓰이게 하려면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정영주 이사장은 노조 전환에 대해 “우리나라 뮤지컬 산업은 미국 시스템과 많이 다를 수밖에 없고, 노조 형태를 띠려면 지금의 규모로는 힘들다”고 말했다. 다만 “브로드웨이와는 다른 구조지만 우리도 뮤지컬 배우가 근로자임을 인정받은 사례가 있다”며 “근로조건 협약은 이제 시작 가능하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대법원이 2018년 방송연기자를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인정해(2015두38092)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이하 한연노)이 방송사와 교섭해 왔다. 그러나 작품마다 계약하고 제작사가 수시로 바뀌는 뮤지컬 현장에서는 교섭 상대를 특정하기부터 쉽지 않고, 한연노조차 올해 7월 JTBC의 회생 신청 뒤 출연료와 재방송료 지급이 밀리자 입장문을 내고 미지급 규모와 변제 계획 공개를 요구해야 했다. JTBC는 이튿날 법원 허가를 받아 일부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료를 지급했다며 사과했지만, 이후에도 지급 지연이 이어졌고 8월 말 회생절차가 개시돼 현재 매각이 추진되고 있다.


브로드웨이의 한 뮤지컬 공연장 ⓒ데일리안DB

브로드웨이는 직능 단체와 제작자 단체가 맺는 협약으로 최저 기준을 정한다. 배우·무대감독 5만 1000여명이 속한 노조 액터스 에쿼티(Actors' Equity)는 2022년 제작자 단체인 브로드웨이 리그와 3년 계약을 맺고 최저 주급을 해마다 5%, 4%, 4%씩 올렸으며, 유급 병가 확대와 개막 후 주당 리허설 시간 단축 등을 얻어냈다. 작가·작곡가 단체 드라마티스츠 길드(Dramatists Guild)는 노조가 아니지만 ‘승인 제작 계약(APC)’을 통해 작가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작품 수정과 주요 창작진 고용에 대한 승인권을 갖도록 했다. 해외 공연, 음악 출판, 영상화 권리도 작가에게 남는다. 교섭권 없이 업계 표준 계약을 만든 사례라는 점에서 국내 창작자협회와 처지가 가깝다.


창작자협회가 내세운 수단도 표준계약이다. 창작자협회 창립준비위원회를 이끄는 작곡가 다미로는 “협회가 자체적으로 계약서를 만들어도 제작사들이 쓰지 않으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다”며 “창작자뿐 아니라 제작사와 프로듀서가 함께 참여해 계약 당사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표준계약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도적 방안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예술 지원사업에서 표준계약서 사용 여부를 확인하거나, 계약 체결과 저작권료 정산의 투명성을 평가 요소로 반영하는 방안”을 들었다.


현행 예술인 복지법은 국가가 보급한 표준계약서를 쓰면 문화예술진흥기금 등 재정 지원에서 우대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이를 심사 요건으로 끌어올릴지가 과제다. 예술인권리보장법도 출연료 장기 미지급이나 부당한 계약 조건을 불공정행위로 보고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게 했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재정 지원을 중단하거나 배제할 수 있다. 개별 예술인이 신고와 소송을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협회가 사례를 모아 대응하면 이런 제도의 실효성도 높아질 수 있다. 창작자협회는 법률 고문을 맡은 이어진 변호사(밤티 출판사 대표)를 통해 계약서 검토, 내용증명 발송, 법적 분쟁 지원까지 할 계획이다.


피해를 곧바로 구제할 장치가 없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이종규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은 “앙상블이나 신진 창작자, 스태프 등 여전히 취약한 계층이 많지만, 협회든 진흥법이든 특정 사안의 직접적 피해를 바로 보상할 장치를 확보하기는 어렵다”며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이해관계가 같은 집단이 공제조합을 만들어 ‘선(先) 피해구제, 후(後) 법적 조치’ 방식을 추구하거나, 뮤지컬산업 진흥법이 제정된 뒤 전담기구가 조직과 예산을 갖춰 긴급구제나 법률지원을 맡는 방식이다.


뮤지컬산업진흥법 제정을 위한 국회 공청회 ⓒ한국뮤지컬협회

뮤지컬산업진흥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뮤지컬 산업 진흥 의무를 규정하고 전담기구 설치와 국고 지원, 인력 양성, 인프라 확충, 산업 조사·연구·통계, 수출 지원 등을 담은 기본법이다.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이 2024년 6월 대표 발의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심사 중이며,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올해 4월 “딱히 반대 의견은 없는 것 같다”며 “가을에는 빨리 추진되게끔 챙기겠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기본법이 빨리 제정돼야 하며, 임금체불 같은 사안도 전담기구의 주요 정책과제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협회는 체불 제작사 명단 공개 같은 압박 수단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정 이사장은 “협회는 법원처럼 판단하고 재단하는 단체가 아니다”라며 “산업 전반의 제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의체 구성을 먼저 해야 하고, 한국뮤지컬제작사협회·한국뮤지컬협회와도 논의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뮤지컬제작사협회(이하 제작사협회)는 가입 심사 단계에서 채무불이행 이력을 검토해 회원 가입을 제한하고 있지만, 최근 체불 논란이 불거진 제작사들은 회원사가 아니어서 협회 차원의 자율 규제가 닿지 않는다.


결국 관건은 제작사와의 관계다. 두 협회는 모두 대립이 아닌 협력을 강조한다. 정 이사장은 “배우협회 홀로 존속할 수 없다”며 “산업을 함께 만드는 제작사와 창작자가 모두 협의해 단단하고 투명한 시스템에서 활동할 수 있을 때 제2, 제3의 글로벌 뮤지컬 콘텐츠와 글로벌 배우가 탄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배우협회가 생긴다고 했을 때 제작자 단체가 오히려 환영하고 응원해 줬다”고 전했다.


다미로는 최근 한승원 제작사협회 회장과 만나 현장의 시급한 문제를 논의했고, 창작자협회 발대식 이후 관련 협회들이 함께 포럼을 여는 방안도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한국뮤지컬협회의 행정 지원에는 감사를 표하면서도 “창작자협회는 독립적인 단체로 운영될 것”이라며 “독립적인 조직으로서 각자의 관점을 유지해야 서로 자유롭게, 때로는 다른 의견을 주고받으며 더 나은 방향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한국뮤지컬제작사협회 한승원 회장 ⓒHJ컬처

제작사협회도 두 협회의 출범을 반기고 있다. 한 회장은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처럼 산업이 성장하며 직군별 단체가 형성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며 “최근 정영주 이사장과 협력 방안을 긴밀히 모색했고, 다미로 준비위원장과도 창작뮤지컬의 글로벌 시장 확대와 신진 창작자 보호를 위한 방안을 함께 마련해 나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작사협회, 배우협회, 창작자협회가 고유의 대표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대등하게 연대하고, 뮤지컬학회의 학술 연구와 비평이 뒷받침되는 건강한 거버넌스가 정착돼야 한다”고 했다. 제작사협회는 정책연구 기능을 강화해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의 계약·유통 구조, 예술인 보호 제도를 분석하고, 영국의 공연 제작비 세액공제·환급 같은 제작사 육성 정책을 정부와 국회에 제안할 계획이다. 제작사협회는 배우협회 창립총회에도 참석했고, 앞서 올해 2월에는 노무법인 성일과 업무협약을 맺어 회원사의 인사·노무 관리 지원에 나섰다.


한국뮤지컬협회는 협의체가 꾸려지면 참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이사장은 “단위 협회가 활성화되고 어젠다별 협의체를 구성할 필요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호응할 것”이라며 “연합체 성격의 한국뮤지컬협회가 이를 주도하거나 중재한다는 관점보다는, 산업이 발전적으로 겪어야 할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도록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 현재 방침이고 그 이상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비용 부담은 남는 쟁점이다. 최소 창작비와 2차적 이용 권리 요구가 제작비 부담으로 이어진다는 우려에 다미로는 “제작비 상승에는 배우 출연료와 극장 대관료, 인건비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며 “제작비 부담의 원인을 창작자의 비용으로만 돌리는 것은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방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창작자 대가를 지나치게 낮추는 방식으로 비용을 줄여도 산업 전체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창작자가 지속적으로 활동할 환경이 무너지면 장기적으로 산업 경쟁력도 약해진다”며 “필요한 것은 특정 집단의 비용을 일방적으로 줄이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가 함께 비용 구조를 점검하는 것”이라고 했다.


제작사협회도 제작비 부담을 창작자 탓으로 돌리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한 회장은 “제작비 상승의 원인을 창작자 비용 탓으로 돌리거나 주요 요인으로 분석하고 있지 않다”며 “창작자의 정당한 권리와 보상은 존중돼야 하며, 동시에 초기 기획 개발과 해외 진출을 위해 장기간 자본과 위험을 감수하는 제작사의 투자와 역할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제작사들은 단순한 제작·투자를 넘어 작품 기획과 개발 전반을 총괄하는 프로듀싱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감당하고 있다”며 “어느 한쪽의 일방적 주장보다는 상호 기여와 책임을 인정하고, 합리적인 계약 기준과 지속 가능한 수익 배분 모델을 도출해야 한다”고 했다. 제작사가 기획해 의뢰한 작품과 창작자가 직접 개발한 작품을 구분해 계약 조건을 설계하자는 다미로의 제안과도 맞닿는 대목이다.


뮤지컬 배우 정성화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협회 내부의 합의도 과제다. 배우 정성화는 “이해 상충은 건건마다 다를 것 같고, 배우협회라고 해서 모든 배우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모두가 봤을 때 정말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힘을 실어주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는 “협회가 하자고 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싶으면 다 따라오지는 않을 것”이라며 “상황이나 이슈에 따라 배우들도 같이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협회에 대해서는 “제작자들한테 돈을 더 받아야겠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도 업계의 좋은 발전을 위해 어떻게 애쓸지 머리를 맞대는 곳”이라는 점에서 응원할 만하다고 봤다.


아직 목소리를 낼 창구가 없는 직군도 남아 있다. ‘친정엄마’와 ‘여명의 눈동자’의 체불 피해자 가운데는 무대·음향·조명 스태프가 있었고, ‘친정엄마’의 한 스태프는 밀린 임금을 받으러 제작사 사옥을 찾아갔다가 오히려 ‘무단침입’이라는 내용증명을 받았다. 창작자협회도 우선은 대본과 음악을 만드는 작가·작곡가, 이른바 1차 창작자의 권리 보호에 집중하고, 연출·안무·음악감독으로 범위를 넓히거나 각 분야 단체와 협력하는 방안은 열어두기로 했다. 오케스트라와 기술 스태프를 대표하는 단체는 아직 없다.


이 이사장은 “업계의 문제는 대체로 사적 계약의 불이행에서 발생하고, 그에 따른 법적 책임 공방은 1차적으로 계약 당사자와 법률대리인에게 귀속된다”면서도 “단위 협의체가 있든 없든 업계 종사자가 심각한 피해를 당하거나 산업 생태계에 심대한 폐해를 끼치는 사례가 생기면 정보 공유와 공동 대응 방안 마련 등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1년 목표로 “제작사 단체와 함께 적어도 예술인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을 보장하고, 배우들의 인식 개선을 최우선으로 해 교육과 공청회를 거쳐 협의체를 이뤄내는 것”을 꼽았다. 다미로는 공정한 계약 기준을 현장에 정착시키고, 최소 창작비와 로열티, 저작권 기준을 구체화하며, 각 협회가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는 “협회가 설립되는 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라며 “설립 이후 실제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창작자들이 현장에서 어떤 도움을 받게 됐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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