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포 한 장에 숨통 트인 조선소…투자 부담 줄이고 바다 지킨다 [화학규제 혁신①]

정다운 기자 (sanae@dailian.co.kr)

입력 2026.11.02 07:00  수정 2026.11.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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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물질안전원, 조선업 맞춤형 고시 제정

콘크리트 대신 방유포…시설투자 부담 완화

대형 조선 4사 2조8000억원 절감 기대

해양오염 방지 강화…중소업계 지원 과제

지난달 1일 부산 사하구 동일조선에서 선박이 육상 작업대에 올라와 있다. 선체 주변에는 도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산먼지의 외부 확산을 막기 위한 이동식 방진망이 설치돼 있다. ⓒ화학물질안전원

규제를 풀면 안전도 느슨해질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현장에 맞지 않는 규제는 걷어내고, 필요한 안전장치는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성패는 현장에서 얼마나 제대로 작동하느냐에 달렸다.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치열한 시대, 불합리한 규제는 기업의 발목을 잡고 경쟁력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 데일리안은 화학안전 규제 개선부터 인허가 혁신, 사고 예방까지 달라진 현장을 3회에 걸쳐 살펴봤다. <편집자 주>


지난달 1일 찾은 부산 사하구 코르웰 동일조선주식회사. 육상 작업대에 올라선 거대한 선박의 붉은 선체를 따라 파란색 방진망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고소작업대에 오른 작업자도 선체에 도료를 덧칠하느라 분주했다.


선박 아래 바닥에는 회색 방유포가 넓게 깔렸고, 한쪽에는 검은색 이동식 방지턱이 눈에 띄었다. 도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먼지와 페인트가 땅에 스며들거나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한 장비들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 장비들이 중소 조선소의 시설투자 부담을 덜어줄 대안으로 떠올랐다. 화학물질안전원이 조선업 특성을 반영한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 기준을 새로 마련하면서 고정시설 대신 이동식 설비를 활용할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지난달 1일 부산 동일조선에서 관계자들이 육상 작업대에 올려진 선박 앞에서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화학물질안전원
도색에 닷새, 정박비는 수억원인데…영세 조선소 더 옥죈 ‘시설기준’


부산 사하구에 있는 동일조선은 일종의 ‘선박 카센터’다. 이곳에서는 선박이 육상 작업대에 오르면 작업자들의 손길이 분주해진다. 바닷속에 잠겨 있던 선체 밑바닥에 붙은 따개비와 해조류를 제거하고, 녹슨 부분을 손질한 뒤 도료를 새로 칠해야 해서다.


이때 사용하는 도료 중 하나가 방오도료다. 따개비 등 해양생물이 선체에 다시 달라붙는 것을 막아 물의 저항을 줄이고, 선박의 속도 저하와 연료 소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도색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현장 관계자에 따르면 선박 한 척을 도색하는 데 통상 5일 안팎이 걸린다. 선박의 크기와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정박비가 수억원에 달하는 경우도 있어 작업기간 단축이 중요하다.


도색 작업에 드는 시간과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중소 조선소를 더 옥죈 건 화학물질 취급시설 규제였다. 일부 방오도료에 포함된 피리치온 구리와 피리치온 아연, 산화구리 등이 유해화학물질로 지정되면서 해당 성분을 1% 이상 함유한 제품에도 관련 시설기준이 적용됐다.


기존에는 일반 제조·사용시설 기준에 따라 화학물질의 토양 침투를 막는 바닥재와 외부 유출을 방지하는 집수시설 등을 갖춰야 했다. 하지만 선박 크기와 공정에 따라 작업 장소가 달라지는 조선소에는 이를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웠다. 특히 바닥이 자갈로 된 영세 수리 조선소는 기준을 충족하려면 콘크리트 포장 등 추가 투자가 불가피했다.


방금수 첨단전략산업센터 전문위원은 “더 영세한 조선소는 기본적으로 콘크리트를 다 쳐야 한다”며 “대부분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1일 부산 동일조선의 선박 작업장 바닥에 타포린 재질의 이동식 방유포가 넓게 펼쳐져 있다. 방유포는 페인트 등 화학물질이 바닥을 통해 토양으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한다. ⓒ화학물질안전원
12차례 넘게 현장 누빈 안전원…콘크리트 못 까는 부두서 해법


화학물질안전원은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 6월 30일 ‘조선업종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고시’를 제정했다.


이를 위해 2024년부터 12차례 이상의 현장조사와 기술검토를 거쳤다. 특히 화학물질안전원 관계자들이 조선업계와 시민단체, 전문가 등 입장이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하지만 의견을 모으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조선업계가 기존에 사용하던 도료의 일부 성분이 유해화학물질로 지정되면서 공장에 적용하던 시설기준까지 따라야 한다는 데 난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일부 영세업체는 해당 규제를 자신들과 무관한 일로 여겨 제도 설명부터 시작해야 했다.


윤이 화학물질안전원 화학사고조사분석팀 과장은 “일부 중소 조선소는 유해화학물질 규제를 자신들과 무관한 일로 여기기도 했다”며 “참여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전환점은 인천의 한 조선소에서 찾아왔다. 당시 관계자들이 방문한 조선소는 국가 소유의 부두 부지를 사용하고 있어 콘크리트 포장을 위한 시설물 설치 허가를 받기 어려웠다.


윤 과장은 “현장에 가보니 규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며 “기존 기준만 고수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 산업계와 시민사회는 논의를 거듭하며 접점을 찾아갔다. 윤 과장은 “시민사회는 산업계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산업계는 시민사회의 우려에 공감하면서 조금씩 타협점을 찾았다”며 “이해관계자들이 합의한 안을 마련한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새 기준은 기존 시설의 바닥을 화학물질이 스며들지 않는 재료로 덮는 방식도 인정한다. 이동식 작업이나 해안 인접 작업장에서는 해양 유입을 막는 별도 조치를 갖추면 고정식 집수시설을 대체할 수 있다.


검지·경보설비 기준도 달라졌다. 기존에는 설비 둘레를 기준으로 실내 10m, 실외 20m마다 1개 이상 설치해야 했지만 이동식 작업이나 상시 분무 작업에서는 감시인과 폐쇄회로(CC)TV를 갖추면 예외를 인정한다. 긴급세척시설도 이동식으로 운영할 수 있다.


안전기준도 보완됐다. 국제해사기구(IMO) 기준에 맞춰 강풍 시 옥외 도장 작업을 금지하고, 작업 절차와 점검 결과를 기록하도록 했다. 폐수·폐기물의 적정 처리도 의무사항에 포함됐다. 고압 분무도장 설비에는 전도성 호스와 노즐 보호장치 등을 갖춰야 한다.


이날 동일조선에서 확인한 장비들은 새 기준에 따른 대체조치의 활용 가능성을 보여줬다. 시설 설치 부담은 덜면서도 환경오염 방지와 작업자 안전관리는 강화하는 방식이다.


타포린 재질의 방유포는 도료가 토양에 스며드는 것을 막고, 이동식 방지턱은 오염물질의 해양 유입을 차단한다. 선체 주변의 방진망은 녹 제거와 도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진이 외부로 퍼지는 것을 줄여준다.


선박 건조와 수리를 함께 수행하는 동일조선은 이번 표준작업절차서(SOP)의 현장 적용 가능성을 검증하는 데도 참여했다.


방 전문위원은 “고정시설만 허용하면 영세 조선소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었다”며 “이번 가이드에서 임시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안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1일 부산 동일조선 현장에 간이 이동식 방지턱과 놓여 있다. 검은색 간이 이동식 방지턱은 도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염물질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을 막는 장치다. ⓒ화학물질안전원
규제 바꾸니 수조원 절감 기대…영세 조선소도 ‘화색’


규제 개선에 따른 경제적 효과도 기대된다. 화학물질안전원에 따르면 집수시설과 검지·경보설비 기준 합리화로 대형 조선소 4곳에서 약 2조8000억원 이상의 비용을 절감할 것으로 추산됐다.


중소 조선소도 수혜 대상이다. 특히 바닥이 자갈로 된 영세 사업장은 콘크리트를 새로 포장하는 대신 방유포 등 대체설비를 활용할 수 있어 시설투자 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됐다.


임상오 코르웰 동일조선주식회사 전무이사는 "중소 조선소의 현실을 고려해 기준을 마련한 점이 고맙다"며 "현장 여건을 무시한 채 일률적인 규제를 적용했다면 상당한 부담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새 기준을 현장에 정착시키기 위한 후속 지원은 필요하다. 수십 년간 운영해 온 조선소의 시설을 단기간에 바꾸기 어려운 데다 영세업체는 자체적인 교육과 설비 개선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새 기준이 현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교육 지원도 추진한다. 한국중소조선공업협동조합 소속 약 70개 업체에 표준작업절차서(SOP)와 교육자료를 제공할 계획이다. 화학물질안전원은 추가 현장 설명회 개최도 검토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교육과 함께 실질적인 재정 지원도 뒤따르기를 기대 중이다. 주거지와 인접한 조선소는 도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진과 페인트의 외부 확산을 막아야 하지만, 영세업체가 환경설비 투자와 친환경 도료 개발까지 감당하기는 쉽지 않아서다.


방 전문위원은 "환경 보호를 위한 규제는 필요하지만 중소 조선소에는 부담이 크다"며 "정부가 시설투자를 지원하는 후속 사업도 함께 마련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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