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지, 정산금 미지급으로 계약 해지했지만 팀명 사용 합의 불발
신화·H.O.T.·비스트 거치며 반복된 이름 분쟁
“계약 단계부터 팀명 귀속·종료 후 사용 조건 명시해야”
‘컬처’(Culture)와 ‘리셋’(Reset)을 합친 [컬처리셋]은 문화계의 익숙한 장면을 원점에서 다시 바라보는 칼럼입니다. 무대 위의 화려한 성과와 차트 위의 숫자, 연일 이어지는 화제와 논란 뒤에는 늘 그것을 만들어낸 구조와 사람이 있습니다. 대중문화계의 이슈를 단편적인 사건으로 소비하기보다, 그 배경과 맥락을 읽어내는 데 집중합니다. 업계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관행에 질문을 던지고 새롭게 떠오르는 흐름의 의미를 짚으며, 익숙함을 한 번 ‘리셋’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걸그룹 비비지(VIVIZ)로 활동해 온 은하·신비·엄지가 지난 26일 새 공식 SNS 계정을 열면서 ‘비비지’ 대신 세 사람의 이름을 조합한 아이디(ehsbuj_official)를 내걸었다.
이들은 올해 초 정산금 미지급과 매니지먼트 지원 의무 위반을 이유로 전 소속사 빅플래닛메이드엔터에 전속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법원은 지난 6월 멤버 1인당 1억원이 넘는 정산금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보고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을 받아들였다. 이달 5일 새 소속사 언코어와 손을 잡으며 활동 재개의 길은 열렸지만, 팀명 사용을 두고 전 소속사와 조건이 맞지 않아 새 이름을 검토하는 처지가 됐다.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해 회사를 떠난 쪽이 떠나는 대가로 이름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셈이다.
비비지 멤버 은하, 신비, 엄지 ⓒSNS
세 사람에게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 2015년 여자친구로 데뷔한 이들은 2022년 비비지로 재데뷔했다. 두 이름 모두 이전 소속사들의 권리에 묶여 있어, 데뷔 11년 차인 지금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팀명이 없다.
팀명을 둘러싼 갈등은 가요계에서 꽤 오래된 이야기다. 신화는 SM엔터테인먼트를 떠난 뒤에도 상표권이 다른 회사로 넘어가 있어 사용 계약을 맺고 자신들의 이름을 빌려 써야 했다. 2012년부터 이어진 소송 과정에서는 회사명을 신화컴퍼니에서 신컴엔터테인먼트로 바꾸고 앨범 재킷에서 ‘신화’라는 글자를 빼는 고육지책까지 썼고, 상표권은 2015년 5월 법원 조정을 거쳐서야 넘겨받았다.
H.O.T.는 해체 17년 만인 2018년 재결합 콘서트에서 김경욱 전 SM 대표가 상표권을 내세워 로열티를 요구하는 바람에 공연명을 ‘포에버 하이-파이브 오브 틴에이저스’로 바꿔 달아야 했다. 이 분쟁은 2023년 5월 대법원이 김 전 대표의 상고를 기각하고서야 마무리됐다. 2016년 큐브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끝내고 독립한 비스트는 이듬해부터 하이라이트로 활동하다가, 2024년 상표권 사용에 합의한 뒤 2025년 9년 만에 ‘비스트’라는 이름으로 신곡을 낼 수 있었다.
그룹 하이라이트가 과거 팀명인 '비스트' 상표권을 되찾은 후 진행한 첫 콘서트 ⓒ어라운드어스
물론 다른 결말도 있다. 인피니트는 2023년 전 소속사 울림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상표권을 무상으로 넘겨주면서 이름을 그대로 지닌 채 완전체로 돌아왔다. 다만 당시 이 일이 ‘미담’으로 회자됐다는 점은 곱씹어 볼 만하다. 가수가 자기 팀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일이 전 소속사의 호의에 기대야 하는 선물처럼 여겨진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획사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팀명을 짓고 로고를 만들고 수년간 마케팅 비용을 들여 이름의 가치를 키운 것은 회사의 투자이고, 상표를 등록해 두는 것도 제3자의 무단 사용을 막기 위한 정당한 절차다. 하지만 그 이름에 쌓인 가치에는 무대에 선 멤버들의 시간과 그 이름을 불러 온 팬들의 시간도 함께 담겨 있다. 더구나 비비지처럼 회사가 정산 의무를 지키지 않아 계약이 깨진 경우라면, 의무를 어긴 쪽이 이름을 협상 카드로 쥐고 있는 상황을 투자 회수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같은 분쟁이 세대를 바꿔 가며 되풀이되는 건 계약서가 이 문제를 늘 뒤로 미뤄 두기 때문이다. 데뷔할 때는 누구도 헤어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막상 헤어질 때가 되면 협상력이 있는 쪽이 조건을 정한다. 전속계약 단계에서 팀명의 귀속과 계약 종료 이후의 사용 조건을 명시하도록 하고, 회사의 귀책으로 계약이 끝났을 때는 이름 사용을 막을 수 없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 신화와 H.O.T., 비스트가 걸어온 길을 비비지가 다시 걷지 않으려면, 이름을 돌려받는 일이 누군가의 선의가 아니라 계약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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