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만 만들면 끝?…노인의 낭만을 지키는 네 가지 조건 [급변하는 도시 속 노인의 낭만③]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입력 2026.10.10 10:29  수정 2026.10.1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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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되게 정비되는 도시…관계와 낭만 지켜야

2000원 영화와 5000원 공연 사이…'비용'과 '운영시간'의 체감 격차

65세 이상 인터넷 이용률 79.2%…"영화관 와도 표 못 사면 무용지물, 현장창구 필수"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세련되고 깔끔하게 바뀌어 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속에서 노인(국가데이터처의 '고령자 통계'는 65세 이상을 기준으로 고령인구를 구분한다. 이 기획에서는 이들을 '노인'으로 지칭한다.)이 오랫동안 일궈온 소소한 낭만과 일상의 자리는 점차 설 곳을 잃고 있다.


노인의 문화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은 새로운 건물이나 시설 하나를 지어 올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탑골공원 장기판이 철거된 뒤 인근에 대체 공간인 실내 '문화놀이터'가 들어섰지만 정작 수십 년간 공원을 찾던 어르신들 중 상당수는 손때 묻은 공원 벤치로 발길을 돌렸다. 실버영화관에서는 단돈 2000원이라는 관람료가 문화생활을 지속하는 이유가 됐고, 같은 5000원짜리 공연을 두고도 누군가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인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선택지가 됐다.


공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원하는 이가 그 공간에서 제약 없이 낭만을 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취재 현장에서 확인한 노인의 문화 권리를 지키기 위한 조건은 크게 ▲익숙한 관계 ▲감당 가능한 비용 ▲이용할 수 있는 시간 ▲정보 접근 및 예매 방식 등 네 가지로 나뉘었다.


탑골공원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첫 번째 조건은 오랜 시간 공간에 쌓인 사람 간의 관계와 기억이다. 80대 이상 탑골공원 이용자 중 마포와 송파 등 멀리 사는 이들도, 집 근처 신식 복지시설 대신 집 근처의 신식 복지시설 대신 오래 다닌 탑골공원을 고집했다. 장기판이 사라졌어도 원래 알고 지내던 이들이 있고 장소 자체가 주는 익숙함이 크기 때문이다.


배나래 건양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를 노년기의 '장소애착'(Place Attachment) 관점에서 설명한다. 배 교수는 "새로운 시설이 생겼다고 해서 기존 장소에서 수십 년간 형성된 인간관계와 친근함까지 그대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오랫동안 다닌 장소에는 익숙한 길과 풍경뿐 아니라 그곳에서 나누었던 대화, 경험, 기억이 복합적으로 축적돼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도시 정비라는 명목으로 공간을 깨끗하게 바꿨더라도 기존 이용자가 더 이상 머물기 어렵거나 해오던 일상을 이어갈 수 없다면 이는 물리적으로는 개선되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오히려 접근성이 낮아진 것"이라며 "도시를 새롭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도시에서 오래 살아온 이들이 계속 머물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실버영화관 공연 현장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두 번째 조건은 감당 가능한 가격이다.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4층에 위치한 실버영화관은 60세 이상 노년층에게 단돈 2000원에 옛날 명작 영화를 상영하며 노인의 대표적인 문화 아지트로 자리 잡았다. 특히 매주 월요일 오후 1시 30분마다 열리는 트로트 특별 공연은 유명 가수가 라인업에 오를 때면 이른 아침부터 매표소 앞에 길게 줄이 서고 표를 구하지 못해 발길을 돌릴 만큼 열기가 뜨겁다. 다만 2000원짜리 영화와 달리 5000원인 월요일 공연 관람료를 두고는 노인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누군가는 선뜻 지불하기 부담스럽다고 한 반면, 다른 이는 충분히 저렴하다고 평가했다.


이는 노년층을 단일한 경제적 집단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무조건적인 무료 제공만이 유일한 해답도 아니다. 실버영화관에서 만난 김학경(69)씨는 저렴한 관람료는 반기면서도 "젊은 세대에게 무작정 부담을 주는 방식으로 지원이 확대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소신을 밝혔다.


배 교수 역시 "노인 집단 내부에는 소득, 건강, 교육 수준, 문화적 취향에서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며 "무조건적인 무료화보다는 어르신들이 부담 가능한 수준의 가격 정책과 취약계층에 대한 선별적 지원을 결합하는 정교함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문화놀이터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세 번째 조건은 실질적인 이용 시간이다. 낙원상가 문화놀이터를 선택한 노인들이 꼽은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주말에도 운영한다는 점이다. 평일 낮 시간대 중심의 프로그램 운영만으로는 노인 각자의 다채로운 생활 패턴을 모두 품어내기 어렵다는 뜻이다.


배 교수는 경제적 접근성 못지않게 '시간적 접근성'의 중요성을 짚었다. 노년층의 일상적인 이동 동선, 대중교통 이용 여건, 생활 패턴을 세심하게 고려해 공간의 운영 시간을 다변화해야만 공간이 가진 본래의 기능을 100% 발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네 번째 조건은 예매와 발권 등 문화를 누리기까지의 서비스 이용 방식이다. 노년층의 인터넷 이용은 꾸준히 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6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터넷 이용률은 2020년 55.2%에서 2025년 79.2%로 높아졌다.


그러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복잡한 온라인 회원가입, 좌석 지정, 카드 결제까지 혼자서 완결할 수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2025년 9월 공개한 '콘텐츠 향유 디지털 격차' 보고서는 2024년 만 20~64세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콘텐츠 소비 현황과 전망 조사'를 분석해 콘텐츠 이용 과정의 어려움을 살폈다.


'누구나 청춘무대' 홍보 포스터 ⓒ서울시

티켓 구매에 어려움을 겪은 응답자 526명의 답변을 연령별로 보면 온라인 결제 시스템 이용이 어렵다는 응답은 50대 33.5%, 60~64세 34.9%로 20대(21.6%)보다 높았다. 전화예매·현장구매가 불가능한 점을 어려움으로 꼽은 비율도 50대 29.1%, 60~64세 32.5%로, 20대(17.5%)와 차이가 났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예매를 마치는 비중도 달랐다. 가족·지인의 도움을 받아 온라인으로 표를 구매했다는 응답은 50대 39.2%, 60~64세 51.8%였다.


배 교수는 이 지점에서 '시설 접근성'과 '서비스 접근성'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화관 입구까지 무사히 도착했더라도 표를 살 방법이 없다면 그것은 완전한 접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노인은 디지털 사용을 못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되지만 대면창구, 현장판매, 전화예매 같은 비디지털 경로를 일정 부분 유지하는 '다중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스포츠 및 문화 현장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확산되고 있다. 프로야구 키움 히어로즈는 2026시즌 고척스카이돔 홈경기마다 만 65세 이상 노년층과 장애인 등을 위한 현장 판매 좌석 200석을 전용 창구로 별도 배정해 운영 중이다. 서울시 역시 기존 영화 관람 중심이던 '청춘극장'을 참여·체험형 문화공간인 '누구나 청춘무대'로 개편하며 시범운영을 통해 어르신들의 실제 요구를 조사·반영하고 일부 특별공연은 현장 사전예매 제도를 도입해 문턱을 낮췄다.


실버영화관 매표소 앞.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노인들에게 필요한 문화공간을 단 하나의 형태로 규정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은 팽팽한 장기판이고, 누군가에게는 2000원짜리 추억의 옛 영화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신문을 읽고 잠시 다리를 쉴 수 있는 도서관이다. 정성껏 옷을 차려입고 지하철에 올라 좋아하는 가수의 무대를 찾아가는 것 자체가 삶의 활력이 되기도 한다.


배 교수는 "노년층의 문화복지는 국가나 지자체가 무료로 무엇을 제공하는지보다 노인들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간을 조성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을 계속 찾아올 이유와 경로를 남겨두는 일이다.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부담 가능한 비용으로 자신에게 맞는 시간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오늘날, 도시가 고민해야 할 노인의 자리는 단순히 물리적인 시설의 위치를 넘어 이러한 선택의 권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보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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