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호재 옛말...환율 상승이 비용 압박으로 전환
달러 결제비 급증에 철강·정유·석화 원가 구조 ‘흔들’
환헤지 요청에도 기업은 ‘달러 보유’...외환부담 누적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중후반을 오가는 가운데 철강과 정유, 석유화학 등 수입 의존도가 높은 업종의 원가 압박이 커지고 있다.ⓒ데일리안 AI 삽화 이미지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중후반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으면서 산업계 부담이 커지고 있다. 특히 철강과 정유, 석유화학처럼 수입 의존도가 높은 업종을 중심으로 원가 압박이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원·달러 환율이 1480원대를 오가며 고공 행진을 이어가면서 고환율이 기업 수익성을 갉아먹고 있다.
과거에는 환율 상승이 수출 기업 실적을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최근에는 달러로 결제하는 원자재·부품·에너지 비용이 급증하면서 비용 부담이 먼저 부각되고 있다. 환율 상승이 매출 확대 효과보다 원가 상승 압박으로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산업계가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하는 변화는 원가 구조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 원재료 가격은 즉각 반영되지만 납품 단가 조정은 쉽지 않다. 비용 부담이 기업 내부에 누적될 수밖에 없다. 철강과 정유, 석유화학 업종은 주요 원료를 대부분 달러로 조달하는 구조여서 충격이 더 빠르게 나타난다.
철강업계는 고환율에 더해 미국의 고율 관세와 글로벌 수요 둔화까지 겹치며 이중 압박을 받고 있다. 철광석과 원료탄 등 핵심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는 가운데 환율 상승은 제조원가 상승으로 직결된다. 여기에 보호무역 기조 강화와 중국발 공급 과잉, 내수 부진까지 맞물리며 원가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반영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유업계 역시 연간 10억 배럴 이상의 원유를 달러로 도입하는 만큼 환율 상승이 원유 도입비 증가로 이어진다. 정유사들은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로 원료를 매입하는 ‘내추럴 헤지’로 단기 충격을 일부 상쇄하고 있지만 고환율이 장기화하면 비용 관리 부담이 누적될 수 있다. 석유화학 업계도 원재료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데다 글로벌 공급 과잉으로 제품 가격이 약세를 보이면서 원가 부담을 가격에 전가하기 어렵다.
업계에서는 환율 변동성이 커진 배경으로 미국 관세 이슈와 보호무역 기조 강화, 기업들의 해외 투자 확대 흐름을 함께 거론한다. 현지 투자가 늘면서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원화로 환전하기보다 보유하거나 재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외환시장 안정 요청이 기업들에는 또 다른 부담 요인이다. 최근 정부는 주요 수출기업들을 잇달아 만나 환헤지 확대를 요청했지만 기업들은 일률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환헤지는 향후 외화 거래의 환율을 미리 고정하는 전략으로, 선물환 거래가 대표적이다. 기업이 선물환 매도에 나서면 시장에서 달러 공급이 늘어 단기적으로 환율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면 기업들은 고환율 국면에서 달러를 원화로 바꾸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리스크라고 강조한다. 고환율이 이어질 것이란 인식이 확산되면서 기업의 달러 보유나 해외 재투자 전략은 더 강화될 수도 있다. 전문가들 역시 단기간에 환율이 안정되기는 쉽지 않다고 보고 있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통상 달러 조달이 어려워지면 현물환율이 급등하는데, 최근은 달러를 못 구해서가 아닌 ‘달러가 오를 것 같아서’의 이슈”라며 “현물환율 상승 기대가 꺾이는 지가 관건”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철강·정유·석유화학 등 해외에서 원자재를 조달하는 업종은 중장기 원가 구조 점검과 환율 리스크 관리 전략이 불가피해진 상태다. 산업연구원은 환율이 10% 오를 경우 대기업 영업이익률이 0.29%포인트 하락한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 바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고환율이 일시적이면 환차손(환율 변동에 따른)을 감내하면 되지만, 지금처럼 장기화 조짐이 보이면 원가 구조 전반이 흔들린다”며 “가격 전가가 어려운 업종일수록 수익성 압박이 누적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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