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 피아니스트, 서울성모병원서 음악회 개최
2012년 뇌졸중으로 오른쪽 편마비…뇌 60% 절제
“재활치료사들께 바치는 공연…연주하는 순간이 치료”
“양손으로 연주하는 날까지 재활 멈추지 않을 것”
16일 서울 서초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로비에서 열린 로비 음악회에서 이훈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데일리안 김효경 기자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로비에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졌다. 빠르다가 이내 느려지는 음악은 한 사람의 '왼손'에서 시작됐다. 연주자는 이훈 피아니스트다.
그는 2012년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오른쪽 편마비를 겪었지만, 이날 다시 건반 앞에 섰다. 환자였던 그가 다시 연주자로 돌아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해온 재활치료사들의 손길이 있었다.
이날 음악회는 그들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이훈은 “저를 치료해주신 재활치료사분들을 위해 오늘의 음악회를 열게 됐다”며 “제 인생에서 너무나 뜻깊은 자리”라고 말했다. 환자였던 그를 다시 연주자로 세운 이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무대였다.
이날 연주곡은 ▲스크리아빈 프렐류드와 녹턴 Op.9 ▲고도프스키 명상곡과 엘레지 ▲쇼팽-고도프스키 연습곡 Op.10-3 ▲말로테 주기도송 등으로 구성됐다. 두 손으로 치기도 힘들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이 곡들을 그는 오로지 왼손만으로 연주했다.
공연에 앞서 데일리안과 만난 이훈은 다시 피아노 앞에 서기까지의 시간을 차분히 되짚었다. 서울성모병원 로비 음악회 무대에 선 것은 2016년 이후 9년 만이다. 그는 “조금 더 성장한 피아니스트로 이 자리에 다시 서게 돼 감회가 새롭다”며 “오늘은 더 잘 연주하고 싶다. 솔직히 눈물이 날 것 같다”고 말했다.
16일 서울 서초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로비에서 열린 로비 음악회에서 이훈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오른쪽 가운을 입은 의료진은 그를 치료해준 재활치료사들. ⓒ데일리안 김효경 기자
이훈은 2012년 미국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 중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왼쪽 뇌의 60%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거친 그는 오른쪽 편마비와 언어장애를 겪었다. 그는 “수술 후 10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을 때만 해도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전환점은 한국으로 돌아온 뒤 만난 한 스승의 말이었다. 그는 “‘왼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1000곡이 넘는다’는 말을 듣고, 그날 저녁 바로 ‘도레도레’부터 다시 시작했다”며 “그 말 한마디가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됐다”고 말했다.
왼손 연주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그는 “보통 페달은 오른발로 밟지만, 오른발에 힘이 없어 왼발을 사용한다”며 “왼손 연주에 왼발 페달까지 쓰면 작은 떨림에도 연주 전체가 무너진다. 지금도 여전히 어렵다”고 털어놨다.
재활 과정에서 피아노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치료 그 자체였다. 그는 “재활을 하면서 피아노를 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며 “어떻게 하면 왼손을 더 잘, 더 편하게 쓸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든 과정이 재활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자세를 바로잡고, 몸의 균형을 의식하며 연주하는 순간순간이 모두 치료였다”고 덧붙였다.
10년 넘게 그를 치료해온 한필우 물리치료사는 당시를 떠올리며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오른쪽 편마비로 상지 마비와 보행장애를 함께 겪고 있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한필우 물리치료사는 “뇌졸중을 겪은 환자분들 대부분이 우울감을 겪는다”면서도 “이훈 피아니스트는 처음부터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했고, 치료와 함께 격려와 응원이 이어지자 스스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이훈 피아니스트(가운데)와 재활치료사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데일리안 김효경 기자
재활치료사들 외에도 병원 내 많은 이들이 이훈의 고된 재활 여정에 함께 했다. 그는 “여러 진료과 의료진이 함께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어떤 치료가 더 필요한지 논의했다”며 “소통을 바탕으로 치료 체계를 함께 만들어갔다”고 말했다.
구자성 서울성모병원 신경과 교수와 함께한 꾸준한 재활치료로, 이훈은 지난 2016년 7월 서울성모병원 로비에서 ‘왼손 피아니스트’로서 환자와 내원객을 위해 연주한 바 있다. 이는 단순한 복귀 무대가 아니라, 뇌졸중 환자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 상징적 무대였다.
당시 미국 신시내티대학 박사과정 지도교수도 현장을 찾아 이후 7회의 연주회를 마치면 박사학위를 수여하겠다고 제안했고, 2017년 정식으로 음악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재활 과정을 지켜보며 치료사들 역시 많은 것을 얻었다. 지가은 작업치료사는 “여행이나 독주회에 다녀왔다고 말씀해주실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낀다”며 “재활은 단순한 신체 회복을 넘어, ‘나다운 삶’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인 만큼 치료를 받는 분들께서 용기를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훈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분명하다. 목표는 단 하나, ‘왼손 피아니스트’라는 타이틀에서 ‘왼손’을 떼고 다시 양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다. 그는 “양손으로 연주하는 날까지 재활을 멈추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지금도 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앞서 재활의 걸어온 선배로서 건넨 충고는 ‘묵묵함’이다. “재활은 묵묵히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혼자 하는 연습이 힘들어도 계속하다 보면 몸이 조금씩 돌아온다”며 “저도 13년이 걸렸다. 묵묵히 하면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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