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곁에서 다시 구중궁궐 속으로
제왕의 꿈 꾸게 하는 집무 공간 규모
국민 관광명소 빼앗는 심사는 뭔가
국민은 또 이사비용을 물어야 하나
대통령실은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출범회의에 앞서 진행된 사전환담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을 이날 SNS에 공개했다. ⓒ 이재명 대통령 SNS
다시 청와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이재명 대통령은 굳이 청와대로 들어가야 하겠다고 하는 걸까? 역대 대통령들이 그곳에서 나오는 게 국민 곁으로 가는 길이고, 제왕적 대통령의 이미지를 벗는 길이라고 한목소리를 냈었다. 특히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취임사에서 국민에게 청와대를 떠나 광화문 쪽으로 나가겠다고 공언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국민을 아주 보기 좋게 속인 셈이 됐다. 물론 당초엔 정말로 그렇게 결심했을 수 있다. 그랬지만 막상 옮기려다 보니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들어설 공간을 확보하기가 여의찮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광화문 시대 개막’의 진정성은 불신을 못 면하게 됐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때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 두 차례, 시민사회수석, 그리고 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에서 근무한 기간이 3년여에 이르렀던 그가 집무실의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이전 가능성 여부를 몰랐을 리가 없다. 옮겨갈 수 있다고 판단해서 공언했을 텐데 나중에 식언해 버렸다. 스스로 불신을 산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이 거창하고 요란스레 내걸었다가 슬그머니 거둬버린 그 (대통령으로서의) 공약을 윤석열 전 대통령이 실천에 옮겼다. 야당 측으로부터 온갖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광화문 정부종합청사가 대통령 집무공간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은 문 정부가 거듭 강조했던 ‘이전 무산’의 이유였다. 또 광화문 일대에서는 관저가 들어설 만한 공간이 없다는 것도 그들의 주장이었다.
국민 곁에서 다시 구중궁궐 속으로
청와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새 대통령실로 출근하려 한 윤 전 대통령의 뜻에 부합하는 장소로는 국방부 청사만 한 데가 없었다. 대통령 경호와 외부 연락망 확보에 아주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건물의 견고성이나 위기관리 공간도 이미 갖춰져 있었다.
과다한 이전비용이 주된 비난거리였지만 청와대를 떠나야 한다는 주장은 주로 좌파 정부 때 나왔다. 그것이 ‘제왕적 대통령’에서 ‘민주적 대통령’으로 바뀌는 가장 상징적 사건일 터였다. 이를 실천한 것이 왜 그처럼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했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때였던 1990년 10월에 관저가 완공됐고 이듬해 9월 4일 본관이 준공된 신축 청와대는 연면적이 1만4569㎡(dir 4407평)에 이른다. 이중 본관(지하 1층, 지상 2층)이 8476㎡(약 2564평), 관저가 6093㎡(약 1843평)이다. 본관은 물론이려니와 관저의 규모와 내용도 호사(豪奢)가 넘친다. 그 바로 앞에 있는 조선시대 정궁 경복궁의 어느 전각도 청와대처럼 거대하지는 않다.
노 전 대통령은 준공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새집을 지었다는 말이었다. 그게 80년 신군부 일원이었던 그의 한계였다. 검소와 겸손을 몰랐거나 경시했던 결과가 허풍스러운 건물 규모로 나타났다. 그 이후의 대통령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궁궐 생활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확인하려 했을 뿐이다.
제왕의 꿈 꾸게 하는 집무 공간 규모
참고로 미국의 백악관 본관은 지하 2층 지상 4층이다. 연면적은 5100㎡(약 1543평) 정도다. 청와대 본관은커녕 관저의 연면적에도 못 미친다. 더욱이 백악관은 대통령의 집무실과 부통령, 비서실장, 국가안보보좌관, 대변인 등 주요 인사들의 사무실과 주거 공간이 함께 들어 있는 통합형 관저다. 대한민국이 적어도 ‘대통령의 공간’에서는 미국을 압도하고 있다고 하겠다.
경무대(구 청와대 본관)는 일제의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 재임기였던 1939년 9월에 완공됐다. 미군정 시절에는 군정청 최고 책임관인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이 거주했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최규하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집무실 및 관저로 사용했다. 집은 비록 낡고 작았지만, 신생 대한민국의 기틀이 잡히고 장기 발전계획이 입안·추진된 심장이었다. 윤보선 대통령 때 청와대로 이름이 바뀐 이 관저는 노태우 전 대통령 때까지는 존치됐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기왓장 한 장 남김없이 부수어졌다.
구조선 총독 관저나 구조선총독부 건물이나 국치(國恥)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의 요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건물들은 대통령 이하 고위공직자들이 늘 엄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역사의 거울이었다. 그런데 없애버렸다. 증거를 인멸하면 역사적 사실도 지워진다고 믿었던 것일까?
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 전 대통령은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들의 인식을 공감만 하고 만 게 아니라 실천에 옮긴 것이다. 용산 국방부 건물을 대통령실로, 외교부 장관 관사를 관저로 삼았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좌파 정치세력이 기를 써가며 비난하는 가운데서도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이전은 강행됐다. 비로소 대통령은 구중궁궐을 스스로 떠나 국민 곁으로 옮겨 갔다.
국민 관광명소 빼앗는 심사는 뭔가
막대한 비용이 들긴 했지만, 경호나 지휘 측면에서 보자면 합리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 지어서 갈 시간이 없었을뿐더러 그러자면 비용도 엄청나게 더 소요됐을 것이다. 그때 누가 청와대로 대통령 집무공간이 다시 옮겨지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겨우 빠져나온 왕조적 궁궐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민주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라 왕조의 군주가 되고 싶어 한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대통령이 떠난 청와대는 국민의 관광명소가 됐다. 3년 2개월여간 832만 명이 그곳을 찾았다. 대다수 관람객이 그 규모와 호사스러움에 압도됐다. 우리는 ‘공복’이 아니라 ‘군주’를 모시고 살았구나 하는 배신감에 떤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대통령 혼자만을 위한 본관, 대통령 부부만을 위한 관저가 왜 그처럼 크고 호화로워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워한 국민인들 적었겠는가.
이 대통령 부부를 위해 본관과 관저의 개보수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올해 안에 집무실을 옮길 계획이라니 아마도 본관 공사는 거의 마무리됐을 것이다. 관저는 더 손볼 게 많은지 내년 1월에나 이사가 가능하리라는 말이 나온다. 국민의 관광명소를 빼앗아 들어가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다.
좌파들이 떠들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우파보다는 훨씬 서민 친화적인 마인드를 가졌을 것 같은데 현실은 그 반대다. 기어이 그 궁궐에 들어가 좌정해야 하겠다고 한다. 대통령으로서의 위엄을 거대한 건물로 치레하고 높은 담장으로 국민의 범접을 막아 위압감을 더하겠다는 것인가? 입만 열면 ‘국민이 먼저다’ ‘국민을 위해서’ ‘국민 곁으로’라던 사람들은 어디 갔는가?
국민은 또 이사비용을 물어야 하나
포털 사이트에 ‘청와대’를 검색하면 맨 위에 ‘광장의 빛으로, 다시 청와대’라는 웹사이트 주소가 뜬다. 문해력이 아주 빈곤하지는 않은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짐작이 안 된다. 정권 실세들이 ‘빛의 혁명’이라고 자꾸 떠드니까, 그게 윤석열 퇴진·탄핵 집회 응원봉의 빛을 뜻하는 것이니까 ‘광장의 빛으로’라고 한 것인가? 그렇더라도 청와대에 재입주한다는 것과 ‘빛의 혁명’이 어떻게 이어진다는 것인지 누가 설명 좀 해주시라.
건물의 크기가 권력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나름의 신조를 지녔는가? 거대한 집무공간과 화려한 거주공간이 대통령을 국민의 공복이 아닌 국가의 주인으로 높여줄 것이라 기대하는가? 윤 전 대통령이 집무하던 장소가 싫어서 청와대로 복귀하려는 것인 듯도 한데 그 좁아터진 도량으로 5000만 국민의 리더가 되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 아닌가? 나올 때만큼은 아니라도 복귀 비용 또한 엄청나게 마련이다. 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멀어지기 위해서 하는 이사 비용을 국민에게 부담시키는 게 미안하지도 않은가?
필자의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가 이승만 전 대통령 재임기였다. ‘대통령은 국민의 큰 머슴(혹은 상머슴)’이라는 민주주의의 상식을 그때 배웠다. 우리는 건국한 그날로부터 민주 시민으로 교육되었다. 그런데 21세기에 와서 되레 임금을 모시는 백성의 처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겨우 국민의 시야에 들어왔던 대통령이 다시 궁궐 속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다. 행정부‧입법부를 거의 완벽하게 장악하고 사법부까지 무릎 꿇릴 만큼 권력을 키웠으니 이제 ‘이재명의 국가’(최동석 인사혁신처장이 표현을 흉내 내자면)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청와대 복귀로 표현하려는가?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요? 이 정권의 높은 분들이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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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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