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여백이 완성한 미니멀리즘…‘조씨고아’, 대극장서 증명한 저력 [D: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12.02 13:35  수정 2025.12.02 13:36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 소리에 맞춰 놀다 보면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


2015년 초연 이후 10년, 국립극단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한국 연극계에서 가장 단단한 뿌리를 내린 레퍼토리가 됐다. ‘동양의 햄릿’이라 불리는 원작을 고선웅 연출 특유의 해학으로 비틀어낸 이 작품은, 매 시즌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믿고 보는 연극’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리고 2025년, 10주년을 맞이한 ‘조씨고아’는 기존 명동예술극장을 떠나 1200석 규모의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국립극단

중극장에서 대극장으로의 이동은 단순한 객석 수의 확장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는 작품이 가진 그릇의 크기를 시험하는 무대이자, 10년간 쌓아온 내공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다. 우려와 기대가 공존했던 이번 시즌, 막이 오른 해오름극장에서 확인한 것은 공간의 여백을 통해 작품의 주제 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단연 공간이 주는 압도감이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올려진 해오름극장의 무대는 고선웅 연출 특유의 미니멀리즘이 극대화된 공간이었다. 텅 빈 무대에는 거대한 붉은색 막이 드리워져 있고, 서사의 주요 키워드가 되는 소품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극에 사용되는 소도구들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명동예술극장 시절의 오밀조밀한 밀도가 대극장의 넓은 공간에서 희석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1200석의 거대한 공간은 주인공 정영이 짊어진 고독의 크기를 시각적으로 대변하는 듯했다. 텅 빈 무대 위, 홀로 선 정영의 모습은 이전보다 훨씬 더 작고 위태로워 보였고, 그 덕분에 그가 감내해야 하는 희생의 무게는 더욱 육중하게 객석을 짓누른다.


초연부터 정영 역을 지켜온 배우 하성광과 도안고 역의 장두이의 발성은 객석 끝까지 대사로 가득 채웠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피리 소리에 맞춰 놀다 보면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이라는 대사처럼, 커진 무대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고 광활한 허무 속에 있는 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장치가 됐다.


ⓒ국립극단

무대는 넓어졌으나 고선웅 연출 특유의 속도감은 여전했다. 조씨 가문의 멸족이라는 비극적 서사 속에서도 해학을 잃지 않는 ‘즐거운 비극’의 화법은 대극장에서도 유효했다. 인물들의 과장된 몸짓과 유머는 곧이어 닥쳐올 비극의 무게를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해오름극장의 조명과 음향 시스템은 이러한 연출적 의도를 충실히 구현하며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명동예술극장에서는 배우들의 거친 숨소리가 비극을 전달했다면, 해오름극장에서는 공간을 가르는 빛과 사운드의 울림이 비극의 스케일을 키웠다.


작품은 복수의 통쾌함 대신 그 뒤에 남는 허무함을 조명한다. 정영은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복수를 완성하지만,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고 남은 것은 씁쓸함뿐이다. 도안고의 죽음 이후 정영이 읊조리는 독백은 복수의 완성이 아닌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해오름극장이라는 공간적 특성이 이 ‘허무’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확장하며 더 깊어진 울림으로 관객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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