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8년간 K-컬처 산업을 옭아맸던 한한령(限韓令) 해제에 대한 기대감이 다시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11월 1일 한중 정상회담 만찬에서 나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발언과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 겸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과의 대화가 그 진원지다. 하지만 시장의 기대감과는 별개로, 정부와 업계는 ‘신중론’을 견지하고 있다.
ⓒ박진영SNS
지난 1일 박 위원장은 자신의 SNS에 이재명 대통령, 시 주석과 대화를 나누는 사진을 공개하며, 대중문화를 통해 양국 국민들이 더욱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기원한다는 글을 남겼다. 특히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여당 간사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통해 “시 주석이 북경에서 대규모 공연을 하자는 박 위원장의 제안에 호응해 왕이 외교부장을 불러 지시하는 장면이 연출됐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전해지며 한한령 해제 낙관론에 불을 지폈다.
최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 시 주석이 이 대통령에게 언급한 “아름다운 나비(K-컬처)가 선전까지 날아가 노래도 부를 수 있기를 바란다”는 발언은 이러한 해석에 힘을 싣고 있다. ‘나비’가 K-컬처를 상징하고, ‘선전’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을 언급했으며, ‘노래를 부른다’는 표현이 단순 문화 교류를 넘어 8년간 막혔던 케이팝(K-POP)의 대규모 콘서트 재개를 의미한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긍정적 신호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공식적으로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대중문화교류위원회는 2일 공식 입장을 통해 “공식 외교 석상에서 나눈 원론적 수준의 덕담”이라며 섣부른 판단에 선을 그었다.
정부의 신중론은 지난 8년간 축적된 ‘학습 효과’ 때문이다. 한한령은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명령’이 아니었다. 방송·광고 금지, 케이팝 공연 불허, 한국 드라마·영화 수입 중단, 게임 판호 미발급 등은 모두 ‘보이지 않는 장벽’의 형태로 작동해왔다.
이 때문에 한중 관계가 해빙 무드를 탈 때마다 해제 기대감이 불거졌지만, 실질적인 문은 열리지 않았다. K-드라마가 OTT를 통해 일부 유통되기는 했으나, 케이팝 그룹의 대규모 본토 콘서트는 여전히 원천 봉쇄 상태였다. 최근 케이팝 그룹 이펙스의 공연이 무산되고 케플러의 중국 팬 콘서트, 드림콘서트까지 현지 사정을 이유로 돌연 취소되거나 연기된 사태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장벽’이 여전히 건재함을 방증하는 사례다.
업계가 ‘희망 고문’을 감수하면서까지 중국 시장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는 명확하다. 중국은 한한령 직전까지 케이팝 산업의 최대 ‘캐시카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 따르면 중국은 2025년 기준 세계 음악시장 TOP10 국가 중 하나로, 미국과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에 이어 5위를 차지하고 있다. 8년간 닫혔던 이 거대 시장이 다시 열릴 경우, 케이팝 산업은 제2의 도약을 맞이할 수 있다.
가장 즉각적인 효과는 ‘투어 및 공연’ 수익이다. 케이팝 수익 구조의 핵심인 월드 투어에 중국 본토의 대도시들이 포함될 경우, 막대한 티켓 및 MD(굿즈) 판매 수익이 발생한다. 또한, 중국 특유의 강력한 팬덤 기반 ‘앨범 공동구매’ 문화가 부활하면 앨범 판매량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광고 시장 재진출도 핵심이다. 한한령 이전 케이팝 스타들은 중국 현지 기업의 주요 광고 모델로 활약하며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다.
박시동 경제평론가는 지난 3일 매불쇼에 출연해 “중국이 한한령이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가운데, 지방경제 활성화를 위한 협의 채널을 활성화하라고 언급한 건 ‘지방 단위에서 한국과 편하게 비즈니스를 하라’는 일종의 그라운드를 깔아줬다는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업계는 평가하고 있다”면서 “굉장한 훈풍으로 해석한다”고 봤다.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 역시 “지방경제 활성화를 위한 협의와 개별적 교류를 허락을 한 것”이라며 “우원식 의장이랑 갔을 때도 문화교류와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북경에서 케이팝 콘서트를 열자고 제안했다는 것은 케이컬처의 전면 개방에 가까운 신호탄을 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봤다.
이러한 시장의 기대는 이미 주가에 반영됐지만, 정작 케이팝 업계에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의견이다. 한 케이팝 관계자는 “시 주석의 발언이 현지 당국의 실질적인 행정 조치, 즉 ‘공연 허가’로 이어지는 지가 관건”이라며 “과거와 달리 박 위원장과의 직접 대화 등 구체성을 담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이지만, 8년간 깊어진 불신의 골과 언제든 다시 작동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고려할 때, 실질적인 허가 사례가 나오기 전까지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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