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프리마 파시' 리뷰
2019년 호주에서 초연되어 런던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를 휩쓴 화제작, 인권 변호사 출신 극작가인 수지 밀러가 쓴 ‘프리마 파시’가 한국 무대에 올랐다. 강력한 반증이 제시되기 전까지는 특정 사실이나 주장이 진실로 간주된다는 현대 형법의 대원칙 ‘무죄 추정의 원칙’을 의미하는 제목의 이 연극은, 가장 단단하고 서늘한 지점에서 시작해, 법체계가 내포한 구조적 맹점과 그 안에서 개인이 겪는 비극을 한 배우의 몸을 통해 처절하게 증언한다.
극의 주인공 테사는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한계를 딛고 최고의 명문 법대를 졸업한, 성공 가도를 달리는 형사법 전문 변호사다. 특히 그녀는 성범죄 사건의 피고인 측 변호를 도맡아 연전연승하며 명성을 쌓았다. 테사에게 법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 증거와 논리를 무기 삼아 승패를 겨루는 치밀한 ‘게임’에 가깝다. 피해자의 사소한 말실수나 행동의 불일치성을 파고들어 증언의 신빙성을 무너뜨리는 전략으로 피고인의 무죄를 이끌어내는 데 능숙하다. 즉 그녀는 이 시스템 안에서 유능한 ‘게임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이 견고했던 세계는 한순간에 전복된다. 동료 변호사와의 데이트 이후, 그녀 자신이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이제껏 가해자의 편에 서서 법의 칼을 휘둘러왔던 그녀는, 하루아침에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 칼날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그녀가 무기처럼 사용했던 법의 논리는 그녀의 목을 옥죄는 족쇄가 된다.
‘프리마 파시’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120분이라는 긴 시간을 오직 한 명의 배우가 이끌어가는 모노드라마라는 점이다. 국내 프로덕션은 이자람, 김신록, 차지연이라는 각기 다른 개성과 막강한 내공을 지닌 세 배우를 테사 역에 캐스팅했다.
무대엔 큰 나무 책상과 의자, 조명 등 소도구만 놓여 있다. 그리고 배우의 독백과 행위를 통해 이곳은 때로는 테사의 깔끔한 오피스로, 때로는 사건이 벌어진 참혹한 현장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그녀를 철저히 고립시키는 냉정한 법정으로 변화한다. 관객은 다른 인물의 시선이나 해석이 개입될 여지 없이, 오직 테사의 시점과 목소리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녀의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한 인간이 시스템에 의해 어떻게 소외되고 난도질당하는지를 목격하는 과정에 가깝다. 배우의 숨소리 하나, 떨리는 손끝 하나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어 객석에 파고든다.
이 작품의 미덕은 성폭력 문제를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그리며 감성적 분노에만 호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믿어지는 ‘법’이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구축된 법체계, 기억의 불완전성을 공격하며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결국 ‘2차 가해’를 제도적으로 자행하는 법정의 현실은 과연 정의로운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테사는 절규한다. 왜 피해자가 자신의 모든 삶을 해부당하며 무결점을 입증해야 하는지, 왜 가해자의 ‘아니오’가 피해자의 ‘아니오’보다 더 큰 힘을 갖는지 묻는다. 이는 단순히 연극 속 대사에 머무르지 않고, 2025년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닿으며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환기한다. 미투 운동 이후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사법 시스템의 한계와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프리마 파시’는 잘 만들어진 법정 드라마를 넘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정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숙고하게 만드는 강력한 사회적 텍스트다.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의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공연은 11월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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