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을 넘어, 창작의 동반자로…‘청소년극 창작벨트’의 실험 [과정공유, 미완의 미학②]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09.14 09:11  수정 2025.09.14 09:11

국립극단 ‘청소년극 창작벨트’ 초고 워크숍 현장

"과정공유 문화로 예술을 더 입체적으로 향유"

지난 9월 5일, 국립극단 스튜디오에는 긴장감과 설렘이 공존하는 특별한 열기가 가득했다. 아직 무대 위 조명이 켜지기도 전, 한 편의 희곡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숨을 쉬는 순간이었다.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창작벨트’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초고 기반 워크숍 현장. 이곳에서는 갓 완성된 희곡의 첫 번째 독자가 바로 작품의 영감이 된 청소년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피드백 제공자를 넘어, 작품 개발의 동반자로서 창작 과정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었다.


‘청소년극 창작벨트’는 기존의 리딩 쇼케이스처럼 완성된 결과물을 두고 관객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작품의 씨앗이 뿌려지는 단계부터 청소년들이 함께하며 작가, 제작진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공동 창작’의 형태를 지향한다. 지난 7월 28일 두 팀의 극단이 선정된 후, 작가와 극단의 오리엔테이션(7월 31일)을 거쳐 8월 15일 청소년들과의 첫 협력 워크숍이 시작됐다. 이후 약 2주간의 숙성을 거쳐 8월 31일 마침내 초고가 완성되었고, 바로 이날 처음으로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통해 희곡의 문장들이 생명력을 얻게 된 것이다.


워크숍은 올해 창작벨트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희곡 초고를 청소년들이 직접 배역을 나누어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전문 배우의 능숙한 연기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야기와 감각이 녹아 있는 문장들을 직접 발화하는 청소년들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배우보다도 진실한 떨림이 있었다.


낭독이 끝나자, 희곡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과 작품의 얼개를 직접 확인한 청소년들은 벅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참여 청소년인 최훈성(18, 단재고등학교) 군은 “워크숍을 토대로 제작된 희곡을 처음 읽어봤을 때, 인물의 감정선이 현재의 청소년과 비슷하다고 느꼈고 이러한 결과가 우리의 의견과 워크숍 덕분이라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낭독의 여운이 가시기 전, 작가와 제작진, 청소년들이 둘러앉아 자유로운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 시간은 일방적인 평가나 분석이 아닌, 작품의 세계를 함께 탐험하는 동료들의 유쾌하고 진지한 대화로 채워졌다. 특히 작가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청소년들의 다양한 해석은, 텍스트가 독자를 만나 얼마나 다양하고 깊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번 창작벨트의 가장 큰 의미는 청소년들이 스스로를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창작자의 일원’으로 느끼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지원(17, 광교고등학교) 양은 “이미 완성된 연극 속 세계가 아닌 미완성된 세계를 볼 때 제가 관객보단 창작자의 일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며, “‘본다’라는 느낌보다는 ‘참여한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작품에 반영되는 것을 보며 연극 속 세계와 현실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연극과 예술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기도 했다. 안서현(16세, 고양자유학교) 양은 “다양한 형태의 연극을 만나며 ‘연극’이라는 예술의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을 몸소 느꼈고, 연극에 관련된 즐거운 질문들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유지원(18세, 안양예술고등학교) 양은 “지금까지는 연극을 만들 때 내가 숨을 불어넣어 줬다면, 이제는 내가 연극으로부터 숨을 선물 받는 느낌”이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창작 과정에 참여하며 느낀 변화를 설명했다.


청소년들을 ‘공동 창작자’로 맞이한 도은 작가에게도 이번 경험은 특별했다. 작가는 “이전에는 희곡 탈고 이후 청소년의 언어나 동시대성을 참고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번에는 트리트먼트 단계부터 유기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 생소하면서도 즐거웠다”고 밝혔다.


그는 청소년들과의 협업에서 ‘대상화’의 오류를 피하려 가장 경계했던 부분으로 “청소년 시기를 성인으로 도약하기 위한 과정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을 꼽았다. 한 청소년이 ‘인물들이 억지스러운 말투를 안 쓰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며, 이를 계기로 청소년을 대상화하지 않고 동시대 시민으로서 대화하는 과정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작가는 청소년들과의 워크숍을 통해 ‘상실 이후의 삶’ ‘학교라는 공간에서 부유하는 감각’ 등 작품의 핵심 키워드에 대한 구체적인 힌트와 에너지를 얻었다고 강조했다. 막연하게 낙관적인 결말이 아닌, 낙관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의 동력은 바로 청소년들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교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날의 워크숍은 단순히 한 편의 좋은 청소년극이 탄생하는 과정을 넘어, 창작자와 관객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장이었다. 완성된 결과물을 일방적으로 감상하던 수동적인 ‘관객’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이제 관객은 작품에 의견을 더하는 적극적인 피드백 제공자를 거쳐, 창작의 전 과정을 함께 호흡하고 즐기는 ‘과정의 동반자’로 나아가고 있다.


극단 관계자는 “이러한 ‘과정 공유’ 문화는 창작의 문턱을 낮추고 예술을 더욱 입체적으로 향유하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작품의 최종적인 완성도만큼이나, 그 작품이 어떤 고민과 소통을 거쳐 세상에 나왔는지가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극 창작벨트’는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청소년들과 투명하게 공유하고자 했다. 이런 시도를 통해 창작의 기쁨과 과정의 가치를 공유하는 문화가 공연계 전반적으로 확산했으면 한다”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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