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국 관세 강화로 K-배터리에 전례 없는 기회 창출
북미 완성차·ESS 시장 공략 속 IRA 보조금 효과로 수익성 급등
미국 보조금 의존 심화와 비중국 시장 내 K-배터리 점유율 급락
해가 저물어 모든 사물의 윤곽이 희미해지는 시간. 프랑스인들은 이 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불렀다. 저 언덕 너머의 검은 그림자가 나를 반기러 오는 충직한 개인지, 내 숨통을 끊으러 오는 굶주린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경계와 불확실성의 시간이라는 의미다.
지금 우리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산업이 바로 이 아슬아슬한 황혼녘에 들어서고 있다. 거대한 기회가 손짓하는 듯하지만 그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함께 드리워져 있다.
최근 미국 정부는 중국산 전기차와 배터리에 각각 100%, 25%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특히 에너지저장장치(ESS)용 중국산 배터리 관세는 현재 40.9%에서 내년 58.4%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그 결과, 지난 5월, 중국산 리튬이온 배터리의 미국 수입액은 전년 대비 30%나 급감했다.
미국 정부의 강력한 대중국 견제는 K-배터리에 전례 없는 기회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100% 관세와 배터리 부품에 대한 높은 관세 장벽은 사실상 중국 기업의 북미 진입을 차단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미국 땅에 공장을 짓는 우리 기업에 막대한 생산세액공제(AMPC) 혜택을 제공하며 K-배터리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이런 기회를 발판 삼아 K-배터리 업계는 미래를 향한 투자를 공격적으로 확대하며 실질적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
우선, K-배터리 3사는 미국 빅3 완성차 업체인 GM, 포드, 스텔란티스와 각각 합작공장(JV)을 설립하며 북미 전기차 공급망의 핵심 거점을 확보했다. 전기차 뿐만 아니라 ESS 시장에서도 성과가 이어지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테슬라와 대규모 ESS 공급 계약을 체결했으며 삼성SDI와 SK온 역시 북미 ESS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에 발맞춰 현지 생산라인 확보와 추가 수주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장밋빛 풍경이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의 진짜 모습이다. 지금 우리에게 손짓하는 저 거대한 기회는 정말 '충직한 개'이기만 할까. 개의 모습은 명확하다. 경쟁자가 사라진 운동장에서 마음껏 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개의 그림자 뒤에는 분명 '늑대'가 숨어있다. 첫 번째 늑대는 K-배터리의 '수익성'이 사실은 미국 정부의 보조금이 만든 착시라는 데 있다.
K-배터리 맏형인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2분기 4922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는데, 이 중 AMPC로 받은 금액만 4908억원에 달했다. 다시 말해, AMPC를 제외한 실질적인 영업이익은 14억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는 회사가 벌어들인 이익의 99.7%를 미국 정부의 보조금으로 채운 셈으로, K-배터리 수익 구조가 자체 경쟁력보다 외부 정책에 얼마나 깊이 의존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 무서운 늑대는 우리가 미국만 바라보는 사이, 그 외의 시장을 조용히 사냥하고 있는 중국이다. '안방 시장'에서만 강하다는 편견이 무색하게 이들은 이미 글로벌 영토 확장에 성공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시장에서 K-배터리 3사의 합산 점유율은 37.5%까지 추락했다. 불과 1년 전 45%를 웃돌던 수치에서 8.1%p나 급락한 것이다. 그 사이 LFP 배터리를 앞세운 중국의 CATL은 30%에 육박하는 점유율로 1위를 질주했고 BYD는 150%가 넘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K-배터리에 필요한 것은 단기적인 보조금에 안주하는 게 아닌, 위기를 돌파할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다. 이를 위해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기술로 프리미엄 시장을 선도하는 동시에, LFP 배터리 등 보급형 포트폴리오를 강화해 보조금 없이도 수익을 낼 수 있는 원가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렇게 확보한 기술과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에만 매몰되지 않고 유럽과 아시아 등 글로벌 시장으로 무대를 넓히는 시장 다변화를 이뤄내야 한다.
황혼이 지나고 아침이 왔을 때, 우리 곁에 충직한 개 한 마리가 남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개와 늑대의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이 다가오는지 맞추는 퀴즈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고삐를 쥘 수 있느냐다. 다가오는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길들여 충직한 '개'로 만들어 곁에 둘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늑대 이빨 앞에서도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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