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中 반도체 자립 저지 위해 화웨이·SMIC 블랙 리스트에
이들 두 기업, 中 ‘반도체 굴기’를 견인하는 ‘쌍두마차’로 불려
화웨이·SMIC, 대만 반도체제조 설계·장비·소재에 접근 제한
中, 美 수출규제 우회해 대만기업과 은밀히 협력한 게 주요인
대만이 중국의 인공지능(AI) 반도체 자립을 저지하기 위해 두 팔을 걷었다. 대만 정부가 첨단 AI 칩 개발을 주도하는 중국 화웨이(華爲)와 중신궈지(中芯國際·SMIC)를 수출통제 블랙리스트에 올리면서 미국의 대중(對中) 수출규제에 대만이 공격적으로 가담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 기술규제에 대만까지 본격 가세하면서 중국의 ‘AI 반도체 굴기(崛起·우뚝 섬) 전략’에도 적지 않은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대만 경제부 산하 국제무역서(署)는 지난 14일 자국의 ‘전략적 첨단기술상품 기업’(strategic high-tech commodities) 리스트에 화웨이와 중신궈지를 추가했다고 미 블룸버그통신, 대만 연합보(聯合報) 등이 보도했다. 대만의 현행 규정에 따르면 대만 현지 업체들은 이 블랙 리스트에 올라간 기업에 물품을 수출하려면 대만 당국 승인을 받아야 한다.
미국에서 이미 규제를 받고 있는 이들 기업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이끄는 쌍두마차로 불린다. 중국 최대 통신장비 업체인 화웨이는 첨단 AI칩 개발에 주력하고 있고, 중신궈지는 반도체 칩을 위탁 생산하는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다.
대만의 이번 조치는 별도 공식 발표 없이 조용히 시행됐다. 대만 정부는 지금까지 일부 핵심 반도체 제조장비·기술의 대중 수출을 제한해오긴 했지만, 중국 핵심 기업을 블랙리스트에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거점인 대만이 미국의 대중 압박에 본격적으로 동참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에 따라 화웨이와 중신궈지는 대만이 보유한 반도체 제조공정 설계를 비롯해 공장건설 기술, 장비, 소재 등에 접근이 제한된다. 특히 AI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고급 장비 상당수가 수출통제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는 “이 블랙리스트가 중국의 최첨단 AI 반도체 기술개발 노력을 주도하는 두 회사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반도체 설계업체 엔비디아와 빅테크(기술 대기업) 애플 등에 첨단 칩을 공급하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台灣積體電路·臺積電)의 장비·기술 일부도 수출통제에 포함됐다. 더욱이 이번 블랙 리스트에는 일본과 러시아, 독일 등지에 있는 화웨이의 해외 자회사도 포함돼 수출규제 범위가 대폭 확대됐다.
특히 미 정부의 제재로 장비와 소재, 설계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악조건 속에서도 화웨이는 중신궈지를 통해 7나노미터(㎚·10억분의 1m)공정 기반 반도체를 개발·생산함으로써 중국 '기술 굴기'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미국과 글로벌 경쟁 속에 AI와 반도체를 전략 산업으로 키우고 있는 중국 당국은 첨단기술 자립을 독려하며 두 기업에 지원을 집중했고, 중국 테크 기업들도 자국산 반도체 사용을 늘리며 힘을 보태는 중이다.
미국의 수출 규제로 TSMC의 반도체를 수입하지 못하는 중국 입장에서 두 기업이 반도체 기술 자립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TSMC는 2020년부터 미국의 대중 제재에 따라 화웨이와의 칩 생산 계약을 중단했지만 미 상무부가 올해 초 의회 보고에서 “TSMC가 여전히 수십만개 규모의 일부 칩을 화웨이에 공급하고 있다”고 밝혀 논란을 불렀다.
때문에 대만의 이 같은 조치는 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미국 등 서방의 기술수출 규제를 우회해 대만 기업과 은밀히 협력해왔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만의 일부 기업들은 그동안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 반도체 기업들과 협력을 지속해왔다는 말이다.
대만 정부가 포토리소그래피(빛으로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공정) 기계 등 핵심 반도체 제조장비의 중국 우회수출을 금지하고 TSMC도 화웨이와 거래를 중단했지만, 중국의 반도체 팹(생산시설) 건설과 관련된 수출은 규제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2023년 화웨이의 반도체 팹 건설 현장에서 복수의 대만 기업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음을 폭로한 바 있다.
TSMC 팹 건설 경험이 풍부한 대만 기업들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언어소통도 아주 자유로운 만큼 중국 내 팹 건설계약 수주에 매우 유리하다. 다만 “미국의 제재는 미국산 기술의 중국 수출을 제한하도록 설계돼 있는 까닭에 이 같은 대만 기업들의 관여가 제재 위반인지는 불분명하다”고 블룸버그는 지적했다.
대만 정부가 뒤늦게 화웨이와 중신궈지를 수출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것은 중국의 AI 칩 자립에 핵심적인 기업 두 곳에 대만의 경각심이 커진 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화웨이는 내년에 3㎚ 공정 기반의 반도체 칩을 출시할 계획인데, 생산을 중신궈지가 맡는다.
TSMC는 올해 하반기부터 2㎚공정 양산을 시작하는 만큼 중신궈지와 기술격차는 여전하지만, 중국의 빠른 추격 속도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더욱이 중신궈지는 초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없이 구형 심자외선(DUV) 장비만으로 화웨이의 5㎚ 칩을 개발하며 업계를 놀라게 하는 등 기술 자립 행보가 거침없다. 대체 불가 기술로 이른바 ‘실리콘 방패’라 불리던 대만 반도체의 독점적 지위가 약해지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는 얘기다. 뢰창덕
대만의 수출통제 강화에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다는 시각도 있다. 라이칭더(賴淸德) 총통은 취임 직후 중국을 처음으로 ‘적대적 외국세력’으로 규정하며 전방위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대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대만의 반도체 수출은 전체 수출액의 40%를 차지하며, 이 중 상당수가 첨단 AI·통신 칩 생산에 필요한 설비와 소재다. 상황이 이런 만큼 미국과 대만, 일본 등이 주도하는 반도체동맹의 대중 기술 봉쇄망이 한층 강화됐다는 평가다.
미·중 무역갈등 상황과도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관측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격화되는 미·중 패권경쟁에서 대만이 미국에 보다 밀착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대만을 향해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훔쳐갔다”며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며 보호비 명목으로 미국산 무기구매를 대폭 늘릴 것을 요구했다.
지난 4월에는 대만에 32%의 상호관세를 부과했다. 한국(25%)과 일본(24%) 등 다른 우방국보다 높은 관세율이다. 중국의 군사·경제적 위협에 맞서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대만으로서는 미국의 노골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미국에 더 밀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의 수출통제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제프리 케슬러 상무부 차관은 앞서 12일 의회 청문회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 화웨이와 중신궈지에 대한 거래 라이선스(면허) 발급은 중단됐고 다시는 재개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의 이 같은 언급은 블랙리스트에 이름만 올려 놓고 인텔·퀄컴 등 미 반도체 설계기업에 시스템 반도체를 수출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특별 라이선스를 발급했던 조 바이든 직전 행정부의 행보를 뒤집는 조치다. 케슬러 차관은 “AI 칩이 중국으로 유용된다는 증거가 없다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주장에도 ”미국산 반도체가 중국으로 불법 밀수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그렇다고 대만의 제재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꺾일지는 불투명하다. 지난달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시에서 화웨이가 주축이 돼 운영 중인 대규모 팹 3개가 위성사진에 포착되는 등 중국의 자체적인 반도체 생산능력은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화웨이는 반도체 설계부터 장비 제조, 후공정(패키징)까지 전 공정을 자국 내에서 해결하려는 수직계열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의 대응도 주목된다. 중 상무부는 이미 지난달 21일 화웨이 AI칩 사용을 금지한 미국의 조치를 겨냥해 ‘반(反)외국제재법’ 적용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법은 “각종 핑계로 중국인과 조직에 대해 차별적인 제재를 가할 경우 중국 내 자산과 지식재산 몰수 등 반격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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