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칼의 날’, 그리고 프레더릭 포사이스에 부쳐 [임희윤의 ‘영화 (쏙) 음악’②]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6.13 14:00  수정 2025.06.13 14:00

시리즈 ‘데이 오브 더 자칼’ (쏙) Radiohead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

첫 에피소드 인트로에서 자칼(에디 레드메인)이 변장을 벗고 거울을 보는 장면. ⓒ유튜브 캡처

감정이 없는 삶. 생각해 봤어? 삶도 죽음도, 입금과 살인까지도. 모두 냉정하게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삶…. 어쩌면 그렇게 사는 게 지금 너를 괴롭히는 모든 관계의 스트레스에 대한 해답이 돼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스릴러 시리즈 ‘데이 오브 더 자칼’(웨이브·영국 Sky Atlantic)의 주인공인 코드명 자칼(에디 레드메인 분)을 봐. 저격용 특제 라이플을 민첩하게 조립하는 그의 무표정에서 뭐가 보여? 그 얼음장 같은 차가움 아래엔 어떤 저류가 도사리며 흐를까.


자칼 역의 에디 레드메인은 그동안 특이한 배역을 여럿 맡았지. ‘신비한 동물사전’의 마법사 스캐맨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대니쉬 걸’의 풍경화가 에이나르…. 자칼은 그들과도 조금 달라. 요인 암살은 물론이고 변장과 탈출의 명수이기도 하지. 그에게 믿음이나 신앙 따위는 없어. ‘입금되면 쏜다’야말로 그의 유일한 종교이자 신념일 뿐야.


9일(현지시간) 별세한 영국 소설가 프레더릭 포사이스. ⓒheute.at

‘데이 오브 더 자칼’의 원작 소설가 프레더릭 포사이스가 9일(현지시간) 별세했어. 향년 86세. ‘어벤저’ ‘코브라’ ‘아프간’ 등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작이 바로 이 시리즈의 원작이 된 ‘자칼의 날’(1971년)이야.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청부업자 자칼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데 바로 스파이물의 고전이 됐지. 1973년과 1997년에 영화로 만들어졌고, 지난해 드라마로 만들어져 11~12월에 영국에서 방영했어.


작가 포사이스는 원래 나처럼 기자였어. 로이터통신에서 실제로 드골 대통령 암살 시도 사건을 취재하기도 했고, BBC로 이직한 뒤엔 나이지리아 내전을 취재하면서 한편으론 영국 정보기관 해외정보국, 그러니까 저 유명한 MI6의 비밀 정보원으로도 활약했다지.


그런 생생한 경험이 훗날 소설에 투영됐고 그 정점에 바로 ‘자칼의 날’이 있는 셈이야.


2016년 미국 시카고 롤러팔루자 페스티벌 무대에서 ‘Everything…’을 라디오헤드의 에드 오브라이언(왼쪽)과 톰 요크(오른쪽)이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를 연주한 모습. ⓒ유튜브 캡처

그리고 2024년판 ‘자칼의 날’, ‘데이 오브 더 자칼’은 바로 이 곡으로 시작하지. 오프닝 시퀀스에 흐르는 저 푸른 네온사인 같은 목소리.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야. 이 곡,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는 2000년 앨범 ‘Kid A’를 여는 첫 노래였어. 그땐 아직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따위는 없던 시절이었고, CD나 카세트테이프의 비닐을 뜯고 앨범 첫 트랙을 플레이한 나를 포함한 음악 마니아들은 측두골을 망치로 때려맞은 듯 한동안 멍해져 버렸지.


톰 요크 ⓒ위키미디어 커먼스

라디오헤드가 어떤 밴드였어. 1집 ‘Pablo Honey’(1993년)에서는 파괴적인 ‘Creep’을, 2집 ‘The Bends’에선 슬픈 꿈 같은 ‘Fake Plastic Trees’(1995년)을 들려줬잖아. 3집 ‘OK Computer’(1997년)에서는 세기말 버전의 ‘Stairway to Heaven’(레드 제플린)이라고도 불린 대곡 ‘Paranoid Android’로 충격을 안겼고. 도드라지는 공통점은, 기타였어. 잔뜩 일그러지거나, 풍선처럼 공간을 부유하는 저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


앨범 ‘Kid A’ 표지 ⓒ

그랬던 그들이, 천하의 ‘기타쟁이’ 라디오헤드가, 3년 만에 발표한 새 앨범에서 만인의 기대를 뒤엎듯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돌아온 거야.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가 무대 위에서 기타를 휘갈기는 대신 모듈러 신시사이저의 케이블이나 만지작거리는 장면은 자기 파괴와 염세의 아이콘에게 열광했던 마니아들 중 일부(나 포함)를 분노하게까지 만들기도 했어.


하지만, 아아, 그렇게 낯선 라디오헤드를 떠나보내기엔 음악이 너무도 죽였던 거야.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를 다시 들어볼까?


로봇 목소리처럼 처리된 톰 요크의 알아듣기 힘든 음성…. 몽글몽글 솜사탕 같지만 일반적인 드라마 구조를 따르지 않는 미완의 화성 진행. 특히나 안정적인 4박자의 틀을 깨고 5박자(또는 10박자)의 순환 구조를 반복하는 형식은 따뜻하지만 차디 차고, 포근하지만 불안한 이율배반의 감각으로 시종일관 듣는 이를 옥죄지. 마치 새로 산 따뜻한 핑크 터틀넥 스웨터가 목과 몸에 너무 꼭 끼어서 급기야 살짝 불쾌해지는 순간의 느낌이랄까?


앨범 ‘Amnesiac’ 표지 ⓒ

라디오헤드와 톰 요크는 이런 변칙 박자를 즐겨 사용해. 특히 ‘Kid A’ 이후 앨범들에서. 다음 앨범인 ‘Amnesiac’(2001년)의 대표곡 ‘Pyramid Song’은 심지어 이게 4분의 4박자다, 8분의 12박자다, 아니, 셀 수 없는 박자다 하는 갑론을박이 아직도 있는 고약한 박자의 곡이야.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처럼 안온하면서도 극도로 불안한 느낌을 선사하는 데는 바로 이 비대칭의 박자와 순환 구조가 자리하고 있어.

자칼 역의 배우 에디 레드메인 ⓒ위키미디어 커먼스

한편으로 이 곡이 실린 ‘Kid A’는 뉴 밀레니엄을 상징하는 첫 번째의 선언적 명반이란 의미도 갖고 있지. 음반 제목부터 의미심장하잖아. 라디오헤드가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톰 요크의 소년 같은 목소리와 차갑지만 따뜻한 전자음들은 마치 ‘첫 번째 로봇 소년(모델명 Kid A)’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지. 더구나 ‘Kid A’는 ‘A Kid’(어떤 소년)를 뒤집은 모양도 되지. (그러고 보면 ‘데이 오브 더 자칼’은 뉴 밀레니엄, 그리고 21세기 들어서 처음 리메이크된 ‘자칼의 날’이기도 하네.)


그 첫 곡 제목은 불안정한 악곡과 다르게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모든 게 제자리에)’였고. 꼭 ‘불안한 디스토피아에 온 것 같겠지만, 실은 이게 제대로 된 세상이야. 못 믿겠어?’라고 말하는 악몽 속 안내자의 대사와도 같지.


자칼의 진짜 실체는 무엇일까. 변장한 노인일까. 돈에 눈 먼 냉혈한일까. 아니면 그저 공감 능력은 떨어지고 살상 능력은 출중한, ‘Kid A’일까. 이런 질문들은 어쩌면 ‘진짜 나는 누구인가’라는, 바로 우리 자신들을 향한 근본적인 질문과 겹쳐지는 건 아닐까?


걱정 마. 모든 것, 모든 것, 모든 것은 제자리에….


There are two colours in my head

There are two colours in my head

(중략)

Everything

Everything

Everything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

In its right place

In its right place

In its right place

(Radiohead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 中)


임희윤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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