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K-POP) 시장의 주된 소비자는 10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여성이다. 여성 팬은 좋아하는 연예인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수백 장의 앨범을 사고 공연장에 방문하며 굿즈를 모은다. 충성도 또한 높다. 1세대 보이그룹으로 분류되는 god가 매년 연말마다 체조경기장에서 공연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2020년 들어 여성 팬들의 소비 대상이 바뀌었다. 보이그룹 대신 걸그룹을 택하기 시작한 여성 팬들은 케이팝 시장의 판도를 흔들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걸그룹을 ‘덕질’하기 시작한 여성 팬들의 등장은 걸그룹의 시장 내 위상을 확고히 했다. 아이브, 뉴진스, 에스파, 르세라핌 등의 4세대 걸그룹이 데뷔 직후 여성 팬층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대중성을 갖춘 스타로 도약했으며 5세대 그룹으로 묶이는 베이비몬스터, 미야오, 아일릿 등도 데뷔와 동시에 가요팬들의 관심 속에 안정적인 입지를 다졌다. 주체적 여성상과 감각적 비주얼을 내세운 이들은 여성 팬들의 워너비로 자리매김하며 ‘걸그룹도 돈이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1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베이비몬스터의 콘서트 ‘헬로우 몬스터즈’는 여성 팬들의 티켓 파워를 입증한 대표적인 사례다. 인터파크 티켓에 따르면 티켓 구매자의 81.5%가 여성이었다. 6월 열리는 아일릿의 콘서트 ‘글리터 데이 인 서울’ 또한 티켓 예매자의 78.8%가 여성이며, 7월 개최되는 블랙핑크의 콘서트 ‘데드라인’도 61.7%의 예매자가 여성이다.
걸그룹의 감성적이고 트렌디한 기획은 음원 스트리밍 및 티켓 파워를 넘어 굿즈 시장에서도 두각을 드러낸다. 이는 소비를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MZ세대 여성팬의 니즈와 맞아떨어지며 케이팝 시장에서도 ‘페르소비(페르소나+소비)’ 개념이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 결과 CD 플레이어 버전으로 제작된 ‘아마겟돈’ 앨범은 14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고가에 판매되었음에도 예약 판매 1시간 반 만에 품절됐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이어졌다. 지난해 도쿄 시부야 거리에서 열린 뉴진스의 ‘수퍼내추럴 팝업’은 사전 예약 5분도 되지 않아 마감됐다. 일본 팝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와 협업한 굿즈를 선보인 현장에서 판매된 티셔츠와 모자, 키링, 인형 등은 오픈 하루 만에 품절 소식을 알렸다.
이러한 소비 흐름은 앨범 판매량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2022년 블랙핑크를 시작으로 뉴진스, 아이브, 아이들, 르세라핌, 트와이스 등의 걸그룹이 연이어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초동 100만 장 돌파는 보이그룹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과거와 달리, 에스파가 약 170만 장, 뉴진스와 아이브가 165만 장, 아이들이 153만 장을 판매하며 걸그룹이 대중성 뿐 아니라 팬덤의 구매력까지 확보했음을 입증했다.
5세대 아이돌로 불리는 걸그룹 또한 마찬가지다. 하츠투하츠는 데뷔 앨범 ‘더 체이스’로 초동 40만 장을 기록했고, 이즈나는 데뷔 앨범 ‘나’로 25만 장, 키키는 데뷔 앨범 ‘언커트 검’으로 20만 장을 판매했다. 2010년대 걸그룹 중 가장 높은 초동을 기록한 트와이스가 15만 장의 판매량을 올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눈에 띄는 수치다. 2011년 소녀시대가 정규 3집 ‘더 보이즈’로 6만 7천 장을, 2015년 에프엑스가 정규 4집 ‘포 월즈’로 6만 6천 장을, 2018년 레드벨벳이 미니 2집 ‘썸머 매직’으로 5만 1천 장을 판매한 바 있다.
여성 팬들은 앨범 시장에서도 강력한 소비 주체로서 자리 잡았다. 알라딘에 따르면 역대 걸그룹 초동 1위를 기록한 에스파의 미니 3집 ‘마이 월드’ 포스터 버전을 구매한 소비자의 38.9%는 10대와 20대 여성이었다. 뉴진스의 미니 2집 ‘겟 업’ 파워퍼프걸 버전 소비자 역시 35.3%가 20대와 30대 여성으로 조사됐다. 신인 아이돌의 경우 여성 팬의 영향력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하츠투하츠의 싱글 1집 ‘더 체이스’ 패키지 버전의 소비자 중 43.6%가 여성이었고, 키키의 미니 1집 ‘언커트 검’ 디깅 버전은 무려 58.6%의 소비자가 여성이었다.
이와 관련, 복수의 기획사 관계자는 걸그룹 제작 단계에서 여성 팬들의 영향력을 체감한다고 전했다. 이들은 "이제 기획단계부터 여성 팬덤의 반응을 고려해 전략을 세우는 경향"이라며 "실제로 걸그룹의 콘셉트, 의상, 굿즈까지 모두 여성 소비자가 갖고 싶을 만한 느낌을 주게끔 설계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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