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물과 사구의 난 – 반란일까? 아닐까? [정명섭의 실패한 쿠데타 역사⑩]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5.06 14:01  수정 2025.05.06 14:01

권력은 부모 자식도 나눌 수 없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형제들은 더더욱 나눌 수 없어서 왕위를 놓고 다투는 주요 경쟁자가 된다. 그 결과는 암살을 비롯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례들은 너무나 많다. 고구려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있다.


11월에 왕의 동생인 예물(預物)과 사구(奢句)등이 반역을 도모하였다가 형벌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백제군사박물관에 있는 안악 3호분 행렬도 모형 (직접 촬영)

서기 248년, 중천왕이 즉위한 그해에 벌어진 일이다. 중천왕은 동천왕의 큰아들로 5년 전에 이미 태자로 책봉되어서 지극히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즉위하자마자 동생인 예물과 사구가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반란은 어떤 형태로든 명분이 있어야만 시도라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임금이 난폭하고 나쁜 정치를 펼치기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다고 하거나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이것이 폭넓게 지지받아야만 시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반정인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대신들이 일으켰다.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이인좌를 비롯한 소론 세력들은 영조가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중천왕은 그 두 개의 사항에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그해 9월에 즉위했으니 불과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 동천왕의 큰아들로서 태자로 책봉되어서 정상적으로 계승을 받았으니 핏줄이나 정통성에서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도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반란을 도모했다가 죽었다는 사실 밖에는 없어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몇 가지 추측을 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남는다. 일단 학계에서는 형제 상속이 부자상속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벌어진 문제라는 주장을 한다. 고구려 초기에는 형제간에 왕위를 이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중천왕의 아버지 동천왕은 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받았다. 대개, 왕권이 강화되는 증거로 형제 상속이 부자상속으로 변화하는 걸 꼽는다. 재산이든 왕위든 동생보다는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는 것이 아버지의 자연스러운 바램이라는 점을 감안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중천왕이 아들인 약로를 태자로 삼은 건 8년 후의 일이다. 만약, 나에게 왕위가 안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해야만 반란이라는 모험을 시도할 수 있는데 그 단계에서는 너무 성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면 즉위 단계에서 뭔가 갈등이 있어야 했지만 몇 년 전에 태자로 책봉된 형님을 몰아낼 명분이 두 사람의 손에 과연 쥐어졌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의문들을 제외하고 나면 남은 진실들은 꽤나 잔혹하다.


먼 미래, 먼 나라의 얘기지만 오스만 투르크의 경우 술탄이 즉위하면 형제들을 모두 처형하는 관습이 있었다. 형제들 간에 왕위를 두고 벌어지는 내란을 막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예물과 사구도 혹시나 그런 관습에 의해 살해된 것은 아닐까? 형제들 간에 왕위를 물려주었을 때는 얌전히 기다려도 되었지만 이제 자식에게 물려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동생들은 강력한 경쟁자일 수밖에 없다. 그걸 예측한 중천왕이 미리 손을 쓰려고 했고, 그걸 알아차린 두 동생, 예물과 사구는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음을 당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반란 자체가 꾸며진 가짜일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케이스라면 예물과 사구에게는 대단히 억울한 일일 수도 있다. 1,800년이 지난 지금도 반역자로 기억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울러 두 사람의 이름 뒤에 무리를 뜻하는 등(等)이라는 한자가 붙어있다.


예물과 사구과 그들의 무리라는 뜻으로 해석할 만한데 아마도 측근이나 가족들도 한꺼번에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을 죽이기로 결정했다면 후환을 남겨놓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유와 실체가 애매모호한 왕의 동생들의 일으킨 반란은 안타깝게도 계속 이어진다.


중천왕의 사후 왕위를 물려 받은 서천왕 역시 동생들인 일우와 소발을 반란을 도모했다는 명목으로 처형한다. 물론 두 사람은 서천왕이 재위에 오른지 17년 만에 죽었고, 병을 사칭하고 온탕으로 가서 불순한 무리들과 어울렸다는 혐의가 있었다. 하지만 부자상속제가 확립된 이후 왕의 동생들이 잠재적인 반란자로 의심받는 경우가 이어진 것이다. 서천왕의 아들인 봉상왕 역시 동생인 돌고에게 반란을 꾸민다는 이유로 독약을 내려서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고의 둘째 아들 을불이 탈출에 성공하면서 결국 봉상왕은 국상 창조리에게 쫓겨나고 만다. 도망쳐서 소금 장수를 하던 을불은 창조리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면서 미천왕이 된다. 왕이 반란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형제들을 살해하는 관습은 이후에 사라진다. 부자상속이 자리 잡으면서 굳이 그럴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명섭 작가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