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동이 품은 이야기 [조남대의 은퇴일기(71)]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4.22 14:00  수정 2025.04.22 14:00

익선동은 한 세기의 기억을 품은 채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다. 한옥 지붕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오래된 기와를 어루만지고, 작은 가게들의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커피 향과 구수한 빵 냄새가 사람들을 유혹한다. 선조들이 남긴 흔적과 현대의 감각이 교묘히 얽혀 찾는 이들에게 색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 한옥으로 빼곡한 익선동


일주일에 한 번 서울 종로3가 전철역에 내려 익선동 골목을 지나간다. 큰 길이 있음에도 굳이 이곳을 거쳐 가는 것은 눈과 마음을 풍요롭게 채워주기 때문이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가게들, 갓 구운 빵과 깊은 커피 향,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 냄새가 오감을 자극하는 등 구경거리가 푸짐하다. 마치 한양과 현대가 어우러진 한복판을 거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창덕궁 앞 높게 솟은 빌딩 숲 한가운데에 외딴 섬처럼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신복고주의' 열풍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 명소로 오가는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속에서 어떻게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 전철역에서 나와 익선동으로 들어가는 입구


익선동의 뿌리는 깊고도 오래되었다. 철종이 태어나고, 그 후손들이 살던 누동궁이 있던 자리였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일본인들이 청계천 넘어 종로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그때 한사람이 있었다. 조선의 혼을 지키고자 했던 도시개발업자 정세권은 ’궁궐 앞 우리 땅에 일본인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한다. 넓은 저택을 사들여 작은 한옥을 빼곡하게 짓고 저렴한 가격에 내놓았다. 덕분에 익선동은 일본식 건축물이 아닌 한옥의 온기를 품은 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좁은 골목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서로의 문이 맞닿은 통로에서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며 정을 쌓았다. 그렇게 몇 세대에 걸쳐 선인들을 답습하며 이어져 왔다. 도시화의 파도가 몰아쳐도, 종로 일대에 고층빌딩이 들어서는 동안에도 묵묵히 제 모습을 지켜왔다. 당시 정세권이 없었다면 한옥이 빼곡한 지금의 익선동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에 고개가 절로 숙어진다.


ⓒ 한옥을 개조하여 영업을 하는 가게


익선동을 걷다 보면 길이 끝난 줄 알았던 곳에서 다시 이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지나가야 할 만큼 좁은 길도 있지만 그만큼 오가는 사람들을 가까이 엮어 준다. 처음 왔을 때 길을 찾아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빠져나오는 제주도의 미로공원에 들어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젊은 연인들은 아늑한 골목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외국 여행객들은 낯선 듯 익숙한 이 공간을 사진으로 담아간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와 아랍어까지 다양한 언어가 공존한다. 상인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외국어가 오간다.


ⓒ 익선동에서 한식을 즐기는 외국 관광객


대부분 집은 단층 한옥 기와지붕 아래 ‘부엌-안방-마루-건넌방’의 네 칸을 기본으로 ㄷ자나 ㅁ자 형태를 하고 있다.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방이 사방으로 둘러진 전형적인 중부지방 가옥 구조가 펼쳐진다. 골목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깊숙한 마당과 온돌방의 온기가 마치 숨겨진 이야기처럼 묵묵하게 남아 있다. 곳곳에 자리한 한옥들은 시간을 거슬러 가는 문이 되고, 골목을 감싸는 담벼락들은 근대와 현대의 경계를 허무는 가교가 된다. 익선동 과거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여전히 숨 쉬는 흔적이다.


ⓒ 익선동의 한옥 골목


조선 왕조가 사라짐에 따라 궁에서 나온 궁녀들이 한복을 짓고 떡을 만들어 팔았으며, 국악인들은 전통의 음률을 이 거리에 남겼다. 지금은 한옥의 모습을 간직한 채 현대적인 감성을 덧입힌 가게들이 자리 잡았다. 그 여파로 고즈넉한 분위기는 많이 잃게 되었지만, 복고풍과 유행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홍대, 을지로와 함께 젊음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주말이면 사람들로 가득 차고 가게마다 긴 줄이 늘어선다. 유럽의 오래된 골목에서 낭만을 느끼듯 익선동은 외국인들에게 특별한 감성을 선물하는 곳이 되었다. 좁고 낡아 보이던 골목이 역사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 빵을 구입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광객


그러나 익선동의 미래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오랫동안 지켜온 주민들은 관광객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상업화되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변화와 소음과 낯선 흐름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으리라. 한옥이라는 공간만 보존하고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 간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보존을 위해 기와, 지붕과 대들보, 서까래 등 한옥의 기본 틀은 지키는 쪽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골목과 한옥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욱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주길 바라고 있다. 바람이 불어도, 시간이 흘러도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 관광객들로 붐비는 익선동 저녁 식당가


익선동 골목과 오래된 한옥들은 백여 년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시대의 흐름을 품어 왔다. 이제 이곳은 거대한 변곡점에 접어들어 어쩌면 가장 화려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통과 현대, 보존과 변화 사이에서 느릿한 시냇물이 바위를 감싸 흘러왔듯이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싶다. 언젠가 골목을 다시 거닐 때, 지금의 풍경이 변하지 않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품고 있는 이야기와 우리들의 기억만큼은 오랫동안 남아 있지 않을까.


ⓒ 한복을 입고 익선동 거리를 오가는 관광객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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