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KAL기 납치사건을 아시나요?"

입력 2008.12.11 21:19  수정

피해자 가족들 ´북한인권 다큐시사회´ "무관심에 멍들어"

“미국은 전사한 유해도 찾아주는데 39년을 방치하다니”

“우리는 피해자인데, 사회에선 소외받고 심신이 지칩니다. 가슴이 아프고 애탈 뿐입니다.”

39주년을 맞은 1969년 대한항공 여객기(KAL기) 납치사건 피해자 가족들이 11일 애달픈 심정을 드러내며 국민적 관심과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 노력을 촉구했다.

이날 세계인권선언60주년대회본부가 주최하고 있는 북한인권주간 행사의 일환으로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인권 다큐시사회’에 참석한 KAL기 납치피해자 가족회 회원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반세기가 다 되도록 생사조차 알 수 없는 혈육을 향한 애끓는 심정을 토로했다.

KAL기 납치사건은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YS-11기가 북한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 함남 원산 근처 선덕비행장에 강제착륙한 사건이다. 승객 47명과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 4명 등 51명 가운데 사건이 발생 후 66일만인 1970년 2월 14일 승객 39명은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지만, 승무원 전원과 승객 7명은 끝내 한국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미귀환자는 기장 유병하, 부기장 최석만, 여승무원 성경희 정경숙, 승객 채헌덕 장기영 임철수 황원 김봉주 이동기 최정웅 등 11명.

납북피해자 가족들은 사건 직후 납북 KAL 미귀환자 가족회를 만들어 활동했지만,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과 국민적 무관심 속에서 활동이 축소되다가 납치된 승무원 성경희 씨의 부친이자 가족회 회장이었던 성충녕 씨의 작고 이후 사실상 해체되다시피한 상태에 놓였었다. 최근 MBC PD였던 황원 씨의 아들인 황인철 씨(피랍탈북인권연대 편집장)가 대표를 맡으면서 KAL기 납치사건에 대한 공론화에 나서고 있다.

피해자 가족들은 “3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KAL기 납치 사건에 대한 관련 자료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아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며 “더욱이 납치된 11명의 생사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이들은 “KAL기 납치사건을 말하면 대다수 국민들은 1987년 KAL기 폭파사건만을 기억한다. 1969년 12월 11일 강릉발 서울행 KAL기가 북한간첩에 의해 공중납치된 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정부와 국민의 무관심은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이제라도 우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려 달라”고 말했다.

이날 시사회에 참석한 전직 국정원 간부인 송영인 국가사랑모임 회장은 “납치된 11명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상류층이자 식자층에 속하는 인물들로, 북한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납치를 전향이라며 체제 선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파급력이 있었다”면서 “따라서 11명을 특별관리대상으로 묶어 이들에 대한 정보를 더욱 감춰뒀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다큐멘터리 시사회에 참석한 납치 피해자 가족들은 숨죽였던 지난 39년의 아픔을 털어놓았다. 가족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초승달같은 아련한 그리움이 눈가에 깃들었고 눈시울이 촉촉해지기도 했다.

이동기 씨(당시 48세, 강릉 합동 인쇄소 대표)의 아들인 이종명 씨(51)는 “사상도 이념도 없는 문제이고, 정치적 음모론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도주의적으로 아버지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해달라는 것”이라며 “그러나 그것조차 해줄 수 없는 게 바로 대한민국이었다”고 서글픈 심경을 드러냈다.

이씨는 “왜 다른 납북자들은 생사확인에 대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는데 11명은 유독 정보가 차단돼 있는지 우리도 의문”이라면서 “우리 가족만 해도 이산가족 상봉때마다 우선순위에 들 정도로 빨리 신청하곤 했었다. 3년 전 여름에는 만날 준비를 하라고 연락이 와서 기대했었는데 추석이 지나도 다른 연락이 없어 문의했더니 생사불명으로 나오더라”고 말했다.

승무원 정경숙 씨(당시 23세, 여)의 오빠인 정현수 씨(78)는 “2001년 2월 제3차 이산가족 상봉 때에는 성경희 씨가 남측 방문단으로 평양에 간 어머니와 만났을 당시 ‘경숙이와 이웃에 살고 있고, 아이들이 이모라 부르며 다를 정도로 왕래하고 있다’고 말해서 적십자사에 면회 신청을 한 적이 있었다”며 “하지만 ‘생사불명’이라는 통보만을 받았다”고 말했다.

69년 12월 납북된 KAL기 여승무원 정경숙 씨와 성경희 씨.(사진 왼쪽부터)

정씨는 이어 “미국은 전사한 군인의 유해라도 찾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다하는데 이렇게 방치하는 건 국가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고 반문한 뒤 “이번 일을 계기로 더 열심히 11명의 송환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MBC PD였던 황원 씨(당시 32세)의 아들인 황인철 씨(42)는 “30~35년이 지나면 국가기록원에서 정보를 자동 공개하는데, KAL기 납치사건은 여전히 기록 공개가 되지 않고 있다. 자료 열람을 위해 경찰청에 신청을 했더니 불허라는 답변이 왔다”며 “당시 이 문제는 국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다소 복잡한 사안이 됐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정확한 사실을 아는 데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황씨는 “가족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자 해도 정보가 차단된 상황인데다 북한에 있을 가족들에게 피해가 돌아갈까 피해자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점이 있다”며 “그러나 이미 피해자들이나 그 가족들이 고령인 만큼, 더 이상 늦출 순 없다. 앞으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11명의 송환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아직도 혈육이 살아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어제일 처럼 생생하다”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는 말로 한맺힌 그리움을 애써 담담히 전했다.

이종명 씨의 부친이 납치된 것은 그가 중학생 무렵. 고등학생이었던 형과 주부였던 어머니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 인쇄소를 직접 운영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아버지는 나를 무척 사랑하셨고, 가정적이셨던 분”이라며 “명절 때는 특히 그립고 생각이 많이 난다”고 눈길을 돌렸다. 말끝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에게 경제적 어려움보다 큰 것은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씨는 “아버지 소식을 들으려고 안 찾아다닌 곳이 없었다. 세월이 지났다고 아버지가 잊혀지겠느냐”고 반문했다.

정현수 씨는 꽃다웠던 여동생의 얼굴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정 씨는 “적십자사에 편지도 쓰고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하고, 북한과 관련된 국제단체 등을 통해서도 수소문해봤다”며 “아직도 잘 믿기지 않는다.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정 씨는 가장 큰 실망감을 느낀 피해자 가족이다. 성경희씨에 의해 생사가 확인됐지만 불과 얼마 뒤 생사불명 통보를 받았다. 정씨는 혹시라도 ‘의도하지 않은 정보가 알려져서 동생에게 무슨 일이 닥친 것은 아닌가’하고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피해자 가족 중에는 기다림이 길어지자 ‘북한에 시집 또는 장가를 보냈다’고 자위하며 속으로 삭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게 이들의 말. 특히 납북자에 대한 정보가 국제사회에 알려지면, 북한에서 정보를 준 이를 색출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전전긍긍할 뿐, 언론에 마음놓고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심경이라고 속내를 밝혔다.

2살 때 아버지가 납치된 황인철 씨는 “내가 아버지가 되고 나니 더욱 아버지가 보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황씨는 “아버지란 어떤 존재일까, 다른 친구들처럼 손잡고 목욕탕도 가고 술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아버지를 닮고 싶은 욕망, 역할모델이 없다는 허탈함이 유년시절에는 늘상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됐다”고 소회했다.

황 씨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납치 이후 극도의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누가 잡아간다”며 황 씨와 그의 여동생을 학교에서 조퇴시킨 일도 수십차례. 자식들이 집 밖에 나가거나 시야 밖으로 벗어나는 것에 어머니는 불안해했다. 그는 “우리에게 경제적 어려움보다 더 한스러웠던 것은 납치자들에 대한 편견과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감시, 그리고 지독한 무관심이었다. 다른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우리 납치자들 문제를 풀어줬음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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