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과점 논란에 "수주잔량 경쟁사가 더 많다" 추켜세우기
상호 비방전 격화 우려…K-방산에 먹칠하는 일 없어야
구승모 한화오션 컴플라이언스실 변호사가 5일 서울 중구 장교빌딩에서 언론 대상 설명회에서 HD현대중공업 임원의 군사기밀 불법 탈취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영국 기자
기업에게 있어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 최대한 잘난 체를 해야 물건을 잘 팔고 일감을 잘 따낸다. 동종업계에 실력이 비등한 라이벌이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끊임없이 “내가 제일 잘나가”를 외치며 자신들의 경쟁력을 부각시킨다.
그런데, 최근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국내 해양방산 산업의 양대 거목이자 강력한 라이벌인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난데없이 “쟤가 더 잘나가”를 외치며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추켜세운 것이다.
“HD현대중공업은 현재 수상함 13척의 수주잔량을 보유하고 있고, 마지막 인도분이 2028년 정도까지인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화오션은 작년 11월에 계약한 ‘울산급 배치3’ 5‧6번함을 포함해서 현재 수주 잔고가 3척에 불과합니다.”
이 발언은 놀랍게도 한화오션 특수선영업담당 수석부장의 입에서 나왔다. 지난 5일 언론 대상 설명회에서 나온 발언이다.
팩트 확인차 통화한 HD현대중공업 고위 관계자는 펄쩍 뛰었다.
“아니, 우리가 더 많다니요. 대형 함정은 이지스 구축함 두 척만 남았고, 국내 물량은 그게 다입니다. 나머진 해외 수출 물량인데 그것도 경비함 같은 작은 것들이에요. 가격 차이가 월등한데 숫자만 많은 게 무슨 의미입니까. 한화오션은 울산급 호위함 두 척 외에도 이지스함보다 훨씬 비싼 잠수함도 세 척이나 짓고 있어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자신들의 함정 수주 실적을 한껏 뽐냈었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달 27일 카를로스 델 토로(Carlos Del Toro) 미국 해군성 장관의 울산 본사 방문 소식을 전하는 보도자료를 통해 “현재 필리핀에서 초계함 2척과 호위함 6척을 수주해 건조하고 있는 것을 비롯, 지금까지 국내 업체 중 가장 많은 총 14척의 해외 함정 수주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고 과시했다.
또 “우리 해군의 차세대 이지스구축함 3척을 모두 건조하고 있는 등 총 100여척의 최첨단 함정을 건조하며 대한민국 영해 수호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도 했다.
한화오션은 언론 대상 설명회 바로 전날인 4일 배포한 방산분야 경력직 채용 보도자료에서 “지난해 5월 한화그룹 편입 이후 울산급 호위함 배치-Ⅲ 5, 6번함 건조사업에 이어 3600t급 중형잠수함 장보고-Ⅲ 배치Ⅱ 3번함 건조사업까지 연달아 수주에 성공했으며, 향후 폴란드·캐나다 잠수함 등 해외 수주에도 박차를 가하며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고 실적을 부각시켰다.
그러던 이들인데, 이 난데없는 ‘겸손배틀’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사실 한화오션 설명회에서의 발언은 ‘독과점 논란’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자리는 한화오션이 HD현대중공업 임원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고발한 배경과 향후 계획을 설명하고자 마련됐다. 여기서는 군사기밀을 유출한 HD현대중공업이 정부 함정 건조사업 입찰자격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화오션의 주장대로 HD현대중공업이 입찰자격 제한을 받게 된다면 한화오션의 독과점 체제가 만들어지지 않겠느냐는 지적이 나오자 “오히려 HD현대중공업의 수주잔고가 더 많다”고 설명하는 와중에 본의 아니게 겸손배틀의 막을 연 것이다.
같은 취지로 HD현대중공업은 한화오션이 자신들의 강점인 잠수함 수주물량은 숨긴 채 HD현대중공업에 대해서는 해외에서 수주한 소형 함정 물량까지 셈에 넣어 과대 포장했다고 맞섰다.
내용상으로는 서로를 추켜 세워주는 모양새가 됐지만, 배경을 따져 보면 ‘겸손의 미덕’을 거론할 만큼 아름다운 장면은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앞으로 둘 사이에는 험한 말들이 오갈 여지가 크다. 이미 한화오션에서는 ‘회사 차원의 조직적 범죄 행위’, ‘꼬리 자르기 식 은폐 시도’라는 말이 나왔고 HD현대중공업은 ‘억지 주장’, ‘짜깁기’라는 표현으로 응수했다.
한화오션의 태도에서는 산업은행 관리체제 하의 대우조선해양 시절, 기밀을 유출당하고도 큰 소리를 내지 못했던 설움을 한화그룹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둔 지금 마음껏 풀어내려는 심정이 느껴진다.
이미 함정 수주경쟁에서 상당한 페널티를 적용받고 있는 상황에서 부도덕한 기업이라는 비난과 함께 입찰자격 제한 압박까지 받는 HD현대중공업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고발이 이뤄졌으니 법적 절차는 진행될 것이고, 말린다고 말려질 일은 아니겠지만, 양사의 공방이 지나치게 과열되는 상황은 지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난을 주고받다 보면 있는 일 없는 일 죄다 들춰내게 돼 있고, 싸움판이 커지면 동네방네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아직까지는 한국 해군의 수요가 두 회사 특수선 사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지만, 해외에는 더 큰 시장이 있다. 육상‧항공 분야에서 일고 있는 K-방산 붐이 이젠 해양으로 확대될 차례다. 서로의 얼굴에 먹칠을 한 채로 나란히 해외 무대에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방산 분야에서의 공방으로 손상된 이미지는 두 회사의 주력 사업인 상선 수주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쟤가 더 잘나가”를 진심으로 외치진 않더라도, 양측이 갈등을 봉합하고 동업자 정신을 바탕에 둔 건전한 경쟁 체제로 되돌아가는 날이 속히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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