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대의 은퇴일기㉒] ‘공기 같은 사람’ 이 여행을 떠났다"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3.03.28 14:01  수정 2023.03.28 14:32

아내가 해외여행을 떠났다. 홀가분하다는 기분이 온몸으로 스며든다. 어둠이 몰려오고 혼자라는 것이 느껴지자 허전하다. 내 마음이 왜 이리 변덕스럽지?


어느 날 아내가 전직 회사 동료들과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한다. 무덤덤하게 알았다고 한 후 한참이 지났다. 일주일 전부터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펼쳐 놓고 옷가지며 화장품을 준비되는 대로 넣어둔다. 오전 10시 반 출발하는 비행기인데 3시간 전까지 공항에 모이라고 했다고 한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공항버스가 있는데도 공항까지 승용차로 태워 줬으면 하는 눈치다. 아무런 대꾸가 없자 날씨가 추우니까 공항버스 승차장까지만 태워 달란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아내가 챙겨 놓은 가방ⓒ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 “용돈을 안 주느냐?”고 한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옷을 만져 보니 지갑이 없다. “지갑을 안 가지고 왔다”고 하자 목소리가 싸늘하게 바뀌면서 “알았다”라며 “앞으로는 국물도 없다”라고 내뱉는다. 속으로 ‘내가 너무 무심했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지갑만 주머니에 있었으면 얼마라도 챙겨주었을 텐데. 어떤 화근이 미칠지 은근히 긴장된다.


예전 같았으며 ‘집 걱정은 하지 말고 동료들과 재미있게 지내다가 오세요’라는 편지와 함께 달러를 환전해서 예쁜 봉투에 넣어주었을 텐데. 나이가 들어서 감정이 무뎌졌는지, 혼자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 마땅치 않았는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좀 심했다고 느껴진다. 승차장에 도착해서 틀어진 심사를 풀어보려고 화제를 돌리며 애를 써 보았지만 굳어진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 신났을 것이다. ‘하하 호호’ 웃으며 포옹하고 인사를 나누는 풍경이 훤히 그려진다. 저녁때가 되자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했다는 짤막한 문자가 왔다. 공항까지 데려다주지 않아 아직도 기분이 풀어지지 않은 것 같다.


아내가 떠나는 날 지방에 행사가 있어 온종일 자동차를 운전하여 집에 왔더니 거실은 컴컴하고 설렁하다. 겨우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켰다. 피곤하여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과 한 쪽과 삶은 달걀 하나로 대강 요기를 했다. 컴퓨터 앞에서 자료를 정리하다 잠자리에 들려고 하여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포도주를 한잔 마셨다. 안주도 없이 혼자 술을 마셨더니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싸늘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지면서 이내 얼굴로 확 올라온다.


거실에 혼자 덜렁 앉아 있으니 정적이 감돈다. 평소 같으면 아내는 실내자전거를 타거나, 매트를 깔아 놓고 요가 자세를 취하든지, TV를 켜 놓고 ‘하하하’ 웃으며 손뼉을 치고 있을 텐데…. 해방감을 맛보기보다는 외로움이 느껴진다. 젊었을 때면 친구들을 불러내 술 한잔하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밤늦도록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을 텐데 갈 곳이 없어 일찍 들어왔더니 허전하기만 하다.

2017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부부 중 16.4%가 우울 증상을 겪고 있다고 한 데 비해, 홀로 사는 노인은 30.2%가 우울하다고 응답했다. 홀몸노인이 부부가 함께 사는 노인보다 우울증 유발률이 2배나 높은 것이다.


떠난 지 겨우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빈자리가 피부에 와 닿는다. 공기의 필요성을 히말라야와 같은 고산지대에 올라가 봐야 알 수 있듯이 매일 같이 지내다 옆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허전함이 밀려온다. 눈치 보이는 사람이 없으니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침대로 들어간다. 그동안 아내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곤 했는데 여행에서 돌아오면 좀 더 자상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 여행기간 동안 식사하기 위해 구입해 놓은 간편식ⓒ

여행 떠나기 전 함께 마트에 가서 혼자 먹는 끼니 수를 계산하여 즉석 간편식을 잔뜩 사 놓았다. 그날그날 입맛에 당기는 것을 골라 먹기 편하게 부엌 식탁 위에 세워 두었다. 사고 보니 삼계탕, 순댓국, 육개장, 갈비탕과 같은 육식 위주다. 혼자 먹기는 양이 많지만 어쩔 수 없어 다 먹었더니 속이 더부룩하다. 평상시 같으면 식사 후 산책가자고 조르는 아내를 따라 아파트 내부를 걷든지 예술의전당까지라도 다녀올 텐데, 마땅히 할 일이 없으니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동안 매일 체중을 기록해 왔는데 여행 떠나고 며칠 후 재었더니 1킬로나 훌쩍 늘었다. 간섭하고 챙겨주는 사람이 없자 운동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있어 그런 것 같다.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운동복으로 갈아 있고 아파트 피트니스센터로 달려갔다. 평소 하던 대로 근력 운동을 하고 러닝머신을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아내가 있으면 먹고 싶다고 말만 하면 신나게 요리를 해 줄 텐데, 며칠 동안 간편식만 먹었더니 싫증이 났다. 참기름에 버무린 신선한 나물과 돼지고기가 듬뿍 든 얼큰한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 군침이 돈다. 미리 사 놓은 사골곰탕 국물에 냉장고에 있는 떡국을 넣어 끓이고 달걀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서 곱게 썰어놓은 지단을 올린 후 소고기 꾸미로 간을 맞췄다. 아내가 해 주던 것보다는 좀 못하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라면과 떡국과 간편식을 내키는 대로 골라가며 먹었다. 식사량은 준 것 같은데 몸무게는 점점 늘어만 간다.


사골국에 떡국을 끓여 준비한 식사와 후식ⓒ

항구에서 물고기를 수조에 넣어 오랜 시간 운반하다 보면 죽는 것이 많은데 여기에 메기를 넣었더니 폐사율이 훨씬 줄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도망을 다녔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해졌다는 것이다. 귀찮기만 하던 잔소리가 메기와 같은 역할을 하고, 부부 노인의 우울증을 절반으로 줄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의 잔소리가 그리워진다.


공항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전화했더니 “짐을 찾아 나왔는데 공항버스가 금방 떠나 다음 버스는 1시간 반 이후에나 있는데 다른 동료들은 남편이 나와서 모두 가고 없다”라며 울먹인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아들도 “어무니 오랜만에 오시는데 ㅋ 배웅 가시나요?”라는 문자를 보내왔었다. 그때라도 눈치를 채고 마중을 갔어야 했는데. 허겁지겁 공항에 도착했지만, 승용차에 타면서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비위 맞추느라 며칠 동안 곤혹을 치렀다. 공기와 같은 존재인 아내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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