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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속 장소 이야기⑨] 일제의 영웅 만들기


입력 2022.11.29 14:00 수정 2022.11.29 14:00        데스크 (desk@dailian.co.kr)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은 적극적으로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의 결과를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러일전쟁의 사상자를 비롯해 그 피해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조기에 종결될 것으로 예측한 여순항 포위전은 5개월간 지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약 6만여 명의 전사·전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전투가 장기화하면서 각기병을 비롯하여 각종 질병에 약 3만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였다.


러일전쟁 관련 카툰, 러시아와 일본이 채무를 기반으로 전쟁을 수행중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Harper’s Weekly(New York), Vol. XLVIII, May 21, 1904) 러일전쟁 관련 카툰, 러시아와 일본이 채무를 기반으로 전쟁을 수행중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Harper’s Weekly(New York), Vol. XLVIII, May 21, 1904)


여순항 포위전, 포트 아서의 러시아군 방어(출처 Illustrated London News, 18 June 1904) 여순항 포위전, 포트 아서의 러시아군 방어(출처 Illustrated London News, 18 June 1904)


여순항 포위전, 일본군의 접근 방식에 대한 조감도(출처 Illustrated London News, 3 September 1904) 여순항 포위전, 일본군의 접근 방식에 대한 조감도(출처 Illustrated London News, 3 September 1904)


여기에 러일전쟁 당시 소요된 전비의 총액은 약 17억 2천만 엔이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정부의 1년 세입의 3.5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0년 전 일본이 청국을 상대로 전쟁했을 때 소요된 전비가 약 2억 엔이었다는 점을 비교한다면 8.5배에 달하는 비용이었다. 당연히 일본 정부 예산만으로는 러일전쟁 전비를 충당할 수 없었다. 일본 정부는 부족한 전비를 채권과 증세 등을 통해 조달하였다.


러일전쟁 기념 관련 그림엽서 및 우표 (출처 絵葉書戦前 兵隊と馬 明治三十七八年戦役紀念郵便切手・1銭5厘 明治三十七八年戦役陸軍凱旋観兵式紀念スタンプ 明治39年 東京) 러일전쟁 기념 관련 그림엽서 및 우표 (출처 絵葉書戦前 兵隊と馬 明治三十七八年戦役紀念郵便切手・1銭5厘 明治三十七八年戦役陸軍凱旋観兵式紀念スタンプ 明治39年 東京)


러일전쟁 중 일본 정부는 일본군이 연전연승이라고 선전하였다. 일본 육군의 여순항 포위와 점령을 비롯하여, 일본 해군이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전쟁 소식은 전혀 달랐다. 많은 이들이 전쟁터 끌려간 후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전사자의 가족이었다. 여기에 전쟁 중 얻은 부상 등으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이군인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여기에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세금을 비롯하여 쌀값과 교통비 등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비용까지 오르면서 많은 이들이 생활고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쟁에서 승리하면 막대한 배상금을 비롯해 보상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평화’를 강조한 신문 기사 (출처 The Portsmouth Herald, 29 August 1905) ‘평화’를 강조한 신문 기사 (출처 The Portsmouth Herald, 29 August 1905)


하지만 포츠머스 강화회담 결과는 일본인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 당시 언론은 조약 체결로 동북아시아의 평화가 올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전후 보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사히 신문 등에서는 이른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함께 전후 일본이 50억 엔의 배상금과 랴오둥반도의 조차지 그리고 여순-하얼빈 간의 철도 등을 강화 조건으로 러시아에서 받을 수 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배상금은 전혀 받을 수 없었고, 그 대신 랴오둥반도의 러시아 조차권과 사할린섬의 북위 50도 이남의 영토를 일본에 양도하고, 그 외 여순-장춘 간의 남만주 지선과 그 부속지의 탄광 조차권 그리고 연해주 연안의 어업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포츠머스 조약 체결 내용은 일본인이 기대하던 결과에 한참 못 미쳤다.


일본 정부는 조약 중 배상금을 포기한 것에 대해 “돈을 원하고 전쟁한 것은 아니다”라고 포장하였지만, 정작 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일본 대장성 대신이었던 소네 아스케는 국채 상환으로 전후 금융 규제에 대해 시급히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하였다. 특히 조약 체결 결과 배상금으로 국채 상환이 어렵다는 것이 명확해지면서 긴축 재정으로 국가 재정 기반을 재정립하지 않으면 미래에 지극히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러시아에 더 이상 배상금 등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진즉부터 전선의 일본군은 전쟁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일본 역시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일본인의 일본 언론사 파괴 (출처 ‘国民新聞社破壊’, 朝日新聞, 1906. 9. 6) 일본인의 일본 언론사 파괴 (출처 ‘国民新聞社破壊’, 朝日新聞, 1906. 9. 6)


1905년 9월 5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강화조약 반대와 일본 측 대표인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탄핵을 위한 집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일본 경찰이 금지시키고 공원의 출입을 봉쇄하는 과정에서 충돌하였다. 군중은 폭동을 일으켜 신문사를 비롯해 중요 시설을 습격하였고, 경찰서 등을 방화하였다. 이에 따라 도쿄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결국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였다. 이때 수십 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수천 명이 검거되었다. 도쿄의 상황은 곧 고베와 요코하마 등으로 확산되었고, 폭동은 전국적 규모로 이어졌다. 이 폭동으로 가쓰라 내각은 총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 신문 표지에 실린 노기 마레스케 (출처 Illustrated London News, 7 January 1905) 해외 신문 표지에 실린 노기 마레스케 (출처 Illustrated London News, 7 January 1905)


이때 노기 마레스케의 두 아들이 전쟁에 참전하였고, 여순항 포위전 중에 전사한 사연은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기에 적절하였다. 일본 언론은 노기 마레스케가 자식을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 정신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식으로 미화하였다. 여기에 1912년 7월 30일 메이지 일왕이 지병인 당뇨로 사망하자, 노기 마레스케 역시 아내와 함께 할복자살한 소식이 호외로 전해졌다. 호외에 러일전쟁에서 발생한 막대한 희생에 책임을 지고 목숨을 끊었다는 노기의 유언이 실리자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경성신사 전경 (출처 京城神社摂社絵葉書(소장 京都大学附属図書館)) 경성신사 전경 (출처 京城神社摂社絵葉書(소장 京都大学附属図書館))


경성신사내 노기신사 (출처 国幣小社 京城神社絵葉書(소장 京都大学附属図書館)) 경성신사내 노기신사 (출처 国幣小社 京城神社絵葉書(소장 京都大学附属図書館))


노기신사 추정 위치 (출처 현재 지도 Never 지도, 비교 지도 1936년 大京城精圖 / 추정위치 표시 필자) 노기신사 추정 위치 (출처 현재 지도 Never 지도, 비교 지도 1936년 大京城精圖 / 추정위치 표시 필자)
경성신사 흔적 (숭의여자대학교 내 / 출처 필자 촬영) 경성신사 흔적 (숭의여자대학교 내 / 출처 필자 촬영)


노기신사 흔적 (남산원 내 / 출처 필자 촬영) 노기신사 흔적 (남산원 내 / 출처 필자 촬영)


이후 일본 각지에 노기를 추모하는 행사와 신사 건립이 이어졌다. 조선에도 노기신사 건립이 추진되었다. 1934년 경선신사 내에 노기신사가 건립되었다. 노기는 일왕을 위해 충성을 다한 끝에 신하로서 신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른바 조선인을 충실한 ‘신민’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적절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직면한 상황을 참고, 인내하면서 충성을 다하면 언젠가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신화 만들기는 나름의 효과를 거두었다. 이를테면 러일전쟁의 실체는 사라지고, 일제의 압도적인 승리와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군신(軍神) 노기 마레스케를 비롯한 영웅에 대한 서사가 마치 중심인 것처럼 만들었다. 군사적으로는 분명 203고지 전투에서 수많은 전사·전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하고 돌격하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었다. 정치적으로는 일제의 압도적인 무력 아래에 조선은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잘못된 평가를 하는 근거가 되었다.


ⓒ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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