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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8>] 상황버섯주


입력 2022.05.27 14:06 수정 2022.05.27 13:45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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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상황버섯주


화창한 봄날 토요일 대낮이었다. 가끔 뵙는 사돈어른을 모시고 오리고기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된 김석규는 평소 마주칠 일이 없었던 적과 조우하게 되었다. 바로 상황버섯주였다. 식당주인이 상황버섯 농장을 운영하는데 손님에게 서비스로 내어주고 있었다. 김석규는 순간 고민에 부닥쳤다. 어젯밤에도 전투를 치르느라 늦게 귀가했기 때문에 아내 박미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6개월 전, 김석규는 알코올중독 증세가 심해 경찰서에 휴직원을 제출했다. 변동원 사건을 처리한 후로 김석규는 부쩍 술을 찾는 횟수가 잦아지더니 어느덧 시간대에 구애 받지 않고 하루 종일 술 냄새를 풍기며 근무했다. 동료 형사들이 수사업무를 수행하는데 지장을 줄 정도였다. 그러자 술에 관한 한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민완구가 시청 계장으로 재직하는 박미옥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김석규의 휴직원을 제출받은 것이었다. 형사3팀장이던 민완구는 당시 경정으로 진급하여 신임 형사과장에 내정된 상태였다.


물론 처음엔 김석규의 반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거셌다. 하지만 동료들의 눈치 볼 것 없이 온종일 편하게 술도 마시면서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아보자며 박미옥이 이도 저도 아니게 모순된 말로 달래자 이미 단순해질 대로 단순해진 김석규는 편하게 술 마실 수 있다는 말에 필이 꽂혀 덥석 휴직원에 도장을 찍었다. 휴직하고 난 며칠간은 온종일 편하게 마시고 싶을 때 술을 마시도록 하여 일단 김석규를 안심시킨 후 이번엔 병원에 입원해서 편하게 술도 마시고 치료도 받아보자고 박미옥이 꼬드겼으나 어쩐 일인지 김석규가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미옥은 술을 좀 줄이지 않으면 병원에 입원시킨다고 엄포를 놓는 선에서 봉합할 수밖에 없었다.


휴직 후 김석규의 음주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알게 모르게 더 늘어나고 깊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박미옥의 눈치를 본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박미옥이 인상을 북 쓰는데도 주전자를 덥석 집어 들었다. 김석규는 비록 아내의 도끼눈이 두려웠지만 적을 코앞에 두고 비겁하게 우회할 수 없어 두려움을 떨치고 주전자를 집어든 것이었다.


“어르신 이거 상황버섯 술인데 한번 드셔보세요. 아주 좋아요.”


“하하, 난 술 잘 못하는데.”


술잔이 가까이 다가오자 사돈어른이 손사래를 쳤다. 김석규는 이미 타오를 대로 타오른 교전의지를 막을 방법이 없어 막무가내로 사돈어른에게 술을 한잔 건넸다. 사돈어른이 마지못한 듯 잔을 받았다. 김석규는 부지불식간에 연합군이 된 사돈어른을 인간방패로 삼아 박미옥의 시선을 외면하며 술잔에 상황버섯주를 따랐다. 바야흐로 전선은 형성되었고 이제 치열한 전투만이 목전에 다가왔다.


상황군의 화력은 은근히 끈끈한 기질이 있었다. 상황군은 후퇴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리고기 모둠 안주의 지원 아래 끈질긴 전투력을 발휘했다. 김석규가 박미옥의 눈치를 받아가면서도, 식당주인이 한 주전자 밖에 주지 않는다는 서비스를 ‘한 주전자 더!’ 하고 외칠 정도였다.


종업원이 입을 삐쭉 낸 뾰로통한 얼굴로 한 주전자를 더 가져 왔다. 김석규는 뾰로통한 종업원의 시선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적과의 교전을 과감하게 전개해 나갔다. 박미옥이 사돈어른과 대화하는 틈을 타 속전속결 초전박살의 맹렬한 의지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전자는 점점 바닥을 드러냈고 김석규는 치열해지는 전투 속에서 차츰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토요일 대낮이라는 시간대와 사돈어른이 있는 자리라는 것을 잊고 오로지 적을 섬멸하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3차 교전 상대로는 뭐로 하지. 또 다시 상황버섯주를 서비스로 달라하기엔 천하의 김석규도 낯이 뜨뜻해졌다. 조금 전 종업원의 뾰로통한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박미옥의 눈치에 못 이겨 휴전을 하려해도 이미 전투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치열해져 버렸다. 김석규는 3차 교전 상대로 내심 찜해둔 ‘소주 일병’을 큰 소리로 외쳤다.


“그만!”


박미옥이 사돈어른이 있는 자리임에도 결국 소리를 꽥 지르고 말았다. 사돈어른이 싸늘한 시선으로 김석규를 흘겨보았다. 김석규는 소주 일병과의 조우를 포기한다는 게 무척 힘들었지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정신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계산대로 향했다. 그러면서 김석규는 좋게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한신이 저자거리에서 건달의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는 수모를 감수하며 후일을 기약한 것처럼 김석규도 박미옥의 호통에 아낌없이 굴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래토록 술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체력도 체력이지만 긍정적인 마인드 역시 중요하니까 말이다.


박미옥이 사돈어른을 모시고 집으로 가자고 할 때 김석규는 대낮 전투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술도 좀 깰 겸 동네 한 바퀴 돌고 가겠다고 말했다. 물론 박미옥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다. 술도 좀 깰 겸이 아니라 술도 좀 더할 겸이겠지. 하지만 사돈어른도 있는 자리라서 박미옥은 귀찮은 듯 손을 훠이 내저었다.


김석규는 제대로 된 교전을 한 번 더 벌이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혼신의 연기력으로 나타나 박미옥이 속아 넘어갔다고 지레 짐작하며 쾌재를 불렀다. 김석규가 가벼운 마음으로 휴대폰을 들어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때 독실한 신앙을 가진 종교인으로서 성직자로 봉직하다가 박봉에 생계보전이 되지 않아 부득이 사업을 벌였는데 사업이란 사업은 벌이는 족족 말아먹는 재주를 지닌 친구였다. 덕분에 친구는 아내와 포지션을 바꿔 전업주부가 되어 있었다.


“봉식아. 뭐 하냐.”


평소 전화를 잘 받지 않기로 호가 난 녀석인데 웬일인지 수월하게 통화연결이 되자 김석규는 기분이 좋아 목청을 높였다. 임봉식은 ‘막내딸 데리고 문화예술회관 앞 둔치에 나와 있는데 바람이 참 좋다’고 말했다.


“그럼 오랜만에 전투 한판 벌여볼까.”


“애도 있는데 전투가 가능할까? 총알도 없고….”


임봉식의 말투에서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연했지만 그렇다고 전투를 회피하려 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애가 있어 전투하기가 어렵다는 말인 듯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전투를 하고 싶어도 총알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백수에게 총알이 있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김석규는 얼른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 보았다. 충분히 1차 전투쯤은 가능한 총알이었다. 더욱이 실내가 아닌 야외로 적을 유인해낸다면 2차전까지도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걱정마라. 총알은 넉넉하다!”


김석규가 호기롭게 외치면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운전하는 개인택시였다.


ⓒ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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