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21> 丈夫出家生不還, 아! 윤봉길...

입력 2008.04.28 15:59  수정

‘만보산사건’, 그리고 마침내 상하이로

윤봉길이 1909년의 안중근처럼, 1920년의 강우규처럼 목숨까지 던질 각오로 절대적 기회만을 엿보던 1931년 7월엔 이른바 ‘만보산사건’이 터졌다. 조선을 삼킨 이후 호시탐탐 완조우(滿洲)를 노리던 일제가 한편으로는 완조우 침략의 구실로, 다른 한 편으로는 중국과 조선, 양국 민족운동 세력의 반일 공동전선투쟁을 분열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꾸몄던 음모의 결과였다.

사건의 발단은 중국 지린성 장춘현의 만보산 지역 농지 수로공사에서 비롯됐다. 일제가 매수한 중국인 지주 하오융더(郝永德)와 그로부터 토지를 조차 받은 조선농민 이승훈(李昇薰) 등, 초기 등장인물의 얼개 자체가 심상치 않았던 저들의 음모. 일제는 이들을 적절히 활용해서 처음엔 중국인과 중국인 사이를 이간질 시켜 분란을 일으켰고, 결국엔 중국인 농민들과 토지 임차인인 조선 농민 사이를 갈라놓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중국과 조선농, 두 민족의 거듭된 갈등 사태는 마침내 조선반도로까지 확장됐다. 국내 신문의 오보(誤報) 때문이었는데, 일이 잘 못되어 가려니까 문제를 키우는 데 있어 부정확한 언론까지 한 몫 가세한 셈이었다.

“현지에 있는 200여 명의 동포와 중국 관민 800여 명이 충돌하여 조선농민 다수가 살상되었고, 당 지역에 주재중인 일본 경찰과 중국인 간에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의 현지 발 기사를 접한 조선 내 경향 각지의 시민들은 일시에 중국인 배척 운동을 일으켰고, 심지어 평양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학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일제가 처음 의도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양상으로 번져 그 파장은 결국 조선과 중국, 양 국민들 사이에 메우기 힘든 골을 팠던 것.

상하이 임시정부 사무실 모습

임시정부가 위치한 상하이의 온도차는 더욱 심했다. 일반 교민들의 생업은 물론 임정의 원만한 활동을 위해서도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는 항상 필수적이었는데, 이상하게 꼬여 나간 만보산사건의 여파는 근래 들어 최대 악재였다.

“보라, 금번 만보산 삼성보 사건을 보라. 그 원인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제1은 빼빼 마른 삼천리강산에서 (일제의 수탈로 우리 농민들이 농토를 잃고 대륙까지) 밀려나오게 된 것. 제2는 그자들의 민족 차별에 있다.”

만보산사건 직후 윤봉길은 분개하며 고향에 있는 동생 남의(尹南儀)에게 편지를 썼다. 이 모든 것이 일제의 교묘한 책략이며, 이 같은 사태를 구실로 저들은 식민지 조선신민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중국을 압박하는 한편, 대륙 침략의 명분으로 삼을 것이란 사실까지 분명하게 읽고 있었기에, 윤봉길로서는 한층 더 긴장됐다. 동생 남의에게 바로 이 같은 심정을 편지글에 담아 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전전의 부평풍랑(浮萍風浪)을 따라 이곳으로 향무소정(向無所定)하여 그간에 후서(候書)도 닦지 못하였다. (필자 주 : 그 동안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느라 소식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구나) 지금 있는 곳은 상하이(上海) 망지로(望志路) 북영길리(北永吉里) 18호던가. 그날그날의 생활은 족하나 장래 일생을 암료하면 파도의 수포에 불과할 것 같다.(필자 주 :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면 파도의 거품처럼 아직 뭔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 답답함만 크구나) - 1931년 8월 15일 서(書).”

어느덧 윤봉길은 상하이에 와 있었다. 1931년 5월 8일, 고향을 떠나온 지 1년 2개월 만에 도착한 상하이였다. 완조우(滿洲)를 거쳐 칭다오에 잠시 안착했던 그는 1930년 겨울과 31년 봄, 두 계절을 그곳에 머물면서 낮에는 교포 세탁소의 회계원으로 일했고, 밤에는 야간노동 강습회에 나가 교민 계몽에 힘썼다. 언젠가 적당한 시점을 택해 독립운동의 중심무대이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떠날 것을 생각하며 ‘큰 일’을 앞둔 사람으로서의 몸가짐에 신중했던 시기였다.

그런 여정을 지나 만난 상하이는 완조우 유랑 시절부터 결심했던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 장부는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 돌아오지 않는다)’의 종착지였다. 또는 칭다오에서 어머니께 내비쳤던 암시대로 ‘이상의 꽃’과 ‘목적의 열매’를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각오했던 실행의 마지막 무대였다. 하지만 5월 초에 도착해 동생 남의 앞으로 편지를 쓰던 8월 15일 이즈음까지만 해도 윤봉길의 상하이 시대는 아직 ‘파도의 수포’ 속에서 ‘만보산사건’의 답답함이나 바라봐야 했던 미완의 현재진행형 속에서만 머물고 있었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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