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왕조 ‘마지막 적자’ 김영만 은퇴

입력 2007.03.10 12:39  수정

‘사마귀 슈터’ 김영만 은퇴선언

공수 겸비한 ‘최고 스몰포워드’

‘거함’ 기아자동차는 한국농구가 낳은 최고의 농구명가 중 하나였다.

현대와 삼성이 실업농구를 양분하던 1986년 창단한 기아자동차는 5연패(1988~92) 포함 7차례의 농구대잔치 우승을 일궈내는 위업을 달성하며 최고의 농구명가로 자리매김했다.

‘농구천재’ 허재를 비롯해 한기범·김유택·강정수·유재학·정덕화·강동희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기아자동차를 이끌었다.

프로 출범 후에도 기아는 원년 우승을 차지하며 농구명가의 자존심을 이어갔다. 시카고 불스가 NBA 최고왕조라면 기아자동차는 한국농구 최고의 왕조였다.

그러나 기아는 2000-01시즌을 끝으로 모비스에 인수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기아왕조의 영광을 이끌었던 선수들도 하나둘씩 은퇴했다.

그리고 이제 기아왕조의 마지막 적자마저 유니폼을 벗었다. ‘사마귀 슈터’ 김영만(35·193cm). 꿋꿋이 기아왕조의 명맥을 이어가던 마지막 적자인 그마저 모교 중앙대 코치 부임을 이유로 9일 은퇴를 선언했다.

마산고-중앙대를 졸업하고 지난 1995년 기아에 입단한 김영만은 데뷔하자마자 주전 자리를 꿰찼다. 1990년대 초중반 기아왕조를 대변했던 허재-강동희-김유택의 ‘허동택 트리오’도 김영만의 입단과 함께 자연스레 ‘허동만 트리오’가 됐다. 김영만은 데뷔와 동시에 농구대잔치 2연패(1995~96)의 영광을 함께 했다. 대선배들 틈에서도 김영만의 플레이는 배짱 두둑하고 흔들림이 없었으며 공수 양면에서 팀 공헌도가 상당했다.

김영만의 전성기는 프로 초창기. 농구선수로서 전성기를 향해 치닫는 시기에 프로농구가 출범했다. 외국인선수들 사이에서도 김영만의 부드러운 슛터치와 강력한 대인마크는 상당한 위력을 떨쳤다. 트레이드마크였던 깨끗한 중거리슛과 외곽슛은 물론이고 페이드 어웨이슛, 골밑 돌파, 속공가담 등에도 능했다. 게다가 상대 움직임을 예측해 따라 붙는 ‘스페셜리스트’ 수준의 수비력은 공격력보다도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더욱이 김영만은 기복이 없는, 꾸준함의 대명사였다. 추승균 이전 최고 스몰포워드는 누가 뭐래도 김영만이었다.

1997-98시즌 베스트5와 수비5걸에 모두 선정된 김영만은 1998-99시즌에도 베스트5를 차지했고, 2000-01시즌에도 수비5걸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김영만은 쇠퇴하던 기아왕조와 함께 조금씩 하향세를 걷고 있었다. 1998년 왼쪽 무릎 수술을 받으며 전성기적 움직임을 상실한 김영만은 2001년 허리 부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공격력이 무뎌지기 시작했고 수비력도 예년만 못했다. 무너져가던 기아왕조를 구하려 무리하게 출장을 감행하다 부상이 도진 탓도 없지 않았다.

기아왕조의 퇴장 후 김영만은 팽 당하는 설움을 맛보며 서울 SK-창원 LG-원주 동부-전주 KCC를 차례로 옮겨 다녔다. 특히 최근 1년 사이 무려 3팀을 전전, 격세지감을 느껴야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FA가 되어 동부 유니폼을 입었으나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올초 전성기를 함께 한 허재 감독의 KCC로 트레이드됐다. KCC에서 마지막 기회를 노렸으나 끝내 세월의 벽은 김영만의 앞을 가로막았다.

김영만은 13일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은퇴식을 치른다. 상대팀은 공교롭게도 동부. 동부에는 김영만이 그토록 따랐던 강동희 코치가 있다. 그리고 KCC 감독은 허재다. 시즌 중 치르는 은퇴식에 ‘허동만 트리오’가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KCC 구단의 김영만에 대한 배려를 느낄 수 있는 대목.

최후까지 기아왕조를 떠받친 ‘마지막 적자’ 김영만. 그의 은퇴로 이제 기아왕조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데일리안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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