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메모리 쟁탈전에 델이 꺼낸 카드…하청 부품값 11조원 보증

백서원 기자 (sw100@dailian.co.kr)

입력 2026.10.22 12:01  수정 2026.10.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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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 공장이 부품값 못 내면 델이 대신 갚아…美 공시서 확인

구매약정 석 달 새 18조6000억원 급증…1년 반 만에 5배로

마이클 델, 메모리 부족 장기화 경고…내년 이후 물량 확보전

델 테크놀로지스의 대규모 AI 추론을 위한 서버 '파워엣지 XE9810' ⓒ델 테크놀로지스

마이클 델 델 테크놀로지스 회장이 메모리 부족이 4년 가까이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 가운데 델이 위탁생산업체의 부품대금까지 최대 86억 달러(약 11조4000억원) 보증해온 사실이 확인됐다. 위탁생산업체가 부품 공급사에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면 델이 대신 갚아주는 구조다. 델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메모리 업체의 고객사이기도 하다.


22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를 분석한 결과, 델이 위탁생산업체의 부품대금 지급을 최대 86억 달러까지 보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델이 지난달 8일 제출한 2분기(5~7월) 분기보고서에 처음 등장한 내용으로, 올해 1월 말 연간보고서와 5월 초 1분기 보고서에는 관련 보증 규모가 기재되지 않았다.


델은 제품 일부를 조립하는 위탁생산업체가 공급사로부터 부품을 직접 구매할 때 해당 공급사에 금융보증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보증 대상 업체와 부품 종류, 보증을 시작한 시점은 공시상 미공개다.


델의 노트북과 서버 등은 외부 위탁생산업체에서도 생산된다. 델이 제공하는 금융보증은 이들 업체가 부품을 직접 구매하는 과정에서 공급사의 대금 회수 위험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델이 대금을 대신 지급하면 이후 위탁생산업체에 해당 금액을 청구할 수 있다.


86억 달러는 델이 실제 지급한 돈이 아니라, 위탁생산업체가 부품값을 갚지 못할 경우 대신 지급해야 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이다. 델은 실제로 대신 갚아야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평가했다. 이번 지급보증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메모리 업체와의 거래에도 적용되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경쟁사와 비교하면 델의 공시는 눈에 띈다. HP와 레노버, 슈퍼마이크로의 최근 공시에서는 같은 형태의 위탁생산업체 지급보증 규모가 확인되지 않는다.


델이 앞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사들이기로 약속한 금액인 '구매약정'도 빠르게 늘고 있다. 5월 초 208억 달러에서 7월 말 348억 달러로 석 달 만에 140억 달러(약 18조6000억원) 증가했다. 지난해 1월 말 65억 달러와 비교하면 1년 반 새 5배가 넘는다. 구매약정에는 부품 구매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유지보수 등도 포함된다.


특히 7월 말 구매약정 가운데 102억 달러는 12개월 이후 이행될 예정이다. 델 회계연도 기준 2028~2029년분 약정은 5월 초 26억 달러에서 7월 말 110억 달러로 한 분기 만에 84억 달러 증가했다. 당장 필요한 물량뿐 아니라 내년 이후의 구매 부담도 커지고 있다.



델 테크놀로지스 CI ⓒ델 테크놀로지스

공시된 348억 달러가 델의 구매 약속 전부는 아니다. 델은 가격을 추후 합의하기로 한 일부 장기 전략적 공급계약을 구매약정 집계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장기 전략적 계약에 대한 설명은 올해 5월 초 1분기 보고서부터 새로 등장했다. 델은 해당 부품 구매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제품 생산에 쓰이는 부품과 원자재 재고도 급증했다. 올해 1월 말 67억 달러에서 7월 말 159억 달러로 반년 만에 2배 넘게 늘었다. 전체 재고자산도 같은 기간 104억 달러에서 213억 달러로 증가했다.


이 같은 부품 확보 움직임은 인공지능(AI) 서버 수요가 급증하고 메모리 공급 부족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나타났다. AI 서버에는 일반 서버보다 훨씬 많은 고성능 메모리가 필요하다. 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메모리 제조업체의 공급 능력이 중요해지고 가격 협상력도 높아지는 상황이다. 마이클 델 회장은 지난 13일 미국 CNBC 인터뷰에서 메모리 부족이 4년가량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새 반도체 공장을 짓는 데 수년이 걸린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델 경영진은 지난 9월 씨티 글로벌 기술·미디어·통신(TMT) 콘퍼런스에서 기업 고객들과 향후 2~4년간의 인프라 공급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데이비드 케네디 최고재무책임자(CFO)는 고객들이 가격보다 공급 물량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며 "공급은 보장하지만 가격은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객에게 장기간 제품 공급을 약속하되 가격 변동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는 의미다.


메모리 공급업체의 장기계약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미국 마이크론도 최근 연차보고서에서 일부 고객과 구매 물량을 미리 약속하는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고객이 약속한 물량을 사지 않더라도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테이크 오어 페이(Take-or-Pay)' 방식이다. 마이크론은 고객이 대금을 내지 못할 경우 은행이 대신 지급하도록 하는 신용장도 70억 달러 규모로 확보했다.


델 입장에서는 구매약정이 늘어난 만큼 위험도 커질 수 있다. 부품 가격이 하락하거나 제품 수요가 예상보다 줄면 취소하기 어려운 구매약정이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다.


한편, 영국계 글로벌 투자은행(IB) 바클레이스는 지난 14일 델의 투자의견을 '비중확대'에서 '동일비중'으로 낮추며 메모리 가격 상승에 따른 매출 증가세가 지속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델의 이번 공시는 메모리 확보 경쟁이 치열해진 글로벌 PC·서버 시장에서 완제품 제조업체가 부품 구매 물량뿐 아니라 공급망의 대금 결제까지 뒷받침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는 업계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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